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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장 속 수많은 ‘설악이들’ 이야기 전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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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7-29 17:42
수정 2020-10-08 11:07

[애니멀피플] 도살장 구조견 설악이와 보호자 이예민씨

진도믹스견 ‘설악’이는 지난해 천안시 한 도살장에서 구조됐다. 지난주 ‘개도살 식용금지’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설악이와 반려인 이예민씨를 29일 경기 하남시 반려견 동반카페에서 만났다.

지난 22일 ‘설악’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많은 친구를 만났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개도살 식용금지’ 기자회견에 견종 대표 당사자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날 설악이는 80여 명의 이모, 삼촌들과 함께 신나는 산책을 다녀왔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시작한 산책의 종착지는 바로 청와대. 목적은 편지 전달이었다. 수신인은 문재인 대통령.

“문 대통령님, 설악이를 만나주세요. 식용 목적 개 도살을 금지해주세요.” 설악이의 ‘데이트 신청서’이 있은지 일주일, 설악이는 답신을 받았을까? 29일 오전 경기 하남시 한 반려견 동반카페에서 설악이와 반려인 이예민씨를 만나 기자회견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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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았던 개…두 달 만에 살아나다

설악이는 큰 개였다. 몸무게가 27㎏ 나 나간다고 했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2살짜리 강아지였다. 테이블 밑까지 쫓아와 신발 냄새를 탐하고, 다른 개와 카페를 찾은 낯선 반려인에게 다가가 간식을 얻어먹었다. 조금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덩치가 맞는 골든 리트리버나 성격 활발한 보더콜리와 금방 친구를 먹고 카페 안을 누비고 다녔다. 설악이가 조금 달라 보이는 점은 왼쪽 귀가 반쯤 잘려있다는 것. 그리고 오른발 발가락이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왼쪽 앞다리는 아직도 수술 상처 때문에 털이 듬성듬성했다.

2019년 8월 구조 당시 설악이 모습(왼쪽)과 현재 모습.

설악이가 지금의 가족을 만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이전에는 충남 천안시 한 개도살장이 설악이의 집이었다. 지난해 8월 천안 도살장 개들을 구조한 함형선 위액트 대표는 설악이를 “죽은 줄로만 알았던 개”라고 표현했다. 그 정도로 설악이의 상태는 처참했다. 뜬장 안에 납작 엎드린 설악이의 왼쪽 다리뼈는 형체만 남아있을 뿐 안이 텅 비어 보일 정도였다. 뜬장에서 꺼내 물을 줬지만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한 달 동안 다섯 번의 다리 수술을 받았다. 살이 녹아내릴 정도로 예후가 좋지 않아 안락사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설악이는 ‘삶의 의지’가 강한 개였다. “개농장 개들을 구조해 보면, 아예 삶에 의지를 안 보이는 애들도 많아요. 나이 든 개들은 아예 밥이나 물을 줘도 곡기를 끊어버려요. 설악이는 좀 달랐어요.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었는데, 수술 2주 뒤는 절뚝이면서 걷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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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반려 결심

설악이가 두 달 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임시보호자로 만난 것이 현재 반려인 이예민씨다. 예민씨도 처음에는 임시보호만 할 생각이었다. 대형견의 국내 입양이 어려운 터라, 설악이도 3주간의 임시보호를 마치면 해외 입양이 추진될 예정이었다. 예민씨와 가족의 마음이 바뀐 것은 임시보호 기간 3주가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집에 와서 처음 이틀간은 화장실 구석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았어요. 세면대 밑에서 물만 먹고 숨고, 밥만 먹고 숨고.” 사흘째 되던 날 예민씨는 억지로 개를 안아서 침대 빈 곳에 뉘였다. 가만히 앉아있던 설악이가 침대에 내려와 화장실에 갔다가, 침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번엔 밥이나 물을 마시고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 뒤 일주일간은 침대에서만 생활했다. 어느 순간 혀를 빼물고 대자로 누워자는 설악이를 발견하고 예민씨는 평생 반려를 결심하게 됐다. “더 이상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 그 생각이 컸어요. 나도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데, 시간 낭비하지 말자.”

다섯 번의 다리 수술을 견뎌낸 설악이는 1년여 만에 마음껏 뛰놀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회복됐다. 이예민씨 제공

도살장에서의 트라우마가 엿보이는 순간들도 물론 있었다. 성인 남성을 만나면 짖거나 얼어붙었다. 가족 중에서도 예민씨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가장 오래 걸렸다. “지금은 아빠를 제일 좋아하죠. 어느 순간 사람을 성별로 구분하지 않고, 가족 자체로 봐주는 것 같아서 기뻤어요.” 반려 생활 처음 세 달간은 분리불안도 심했다. 설악이는 ‘누나’ 예민씨가 없거나 첫째 이음이(6살, 스피츠)가 없으면 울부짖으며 불안해했다.

“설악이는 평생을 혼자 있어 본 적이 없잖아요. 열악한 환경이지만 도살장에서는 개들과 함께 있었을 거고요.” 예민씨는 설악이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씩 산책을 다녔고, 집안의 모든 공간이 익숙해지도록 간식으로 긍정강화 훈련을 시켰다. 간혹 산책 때 이유없이 앞발을 들고 한동안 낑낑댈 때도 있다. “병원에서 검사해보면 아무 이상이 없대요. 심리적인 상처는 아직도 치유 중인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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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많이 받은 행진날…“그렇게 신난 모습 처음”

반려인 이예민씨는 설악이가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겁이 많지만 성격 자체가 좋아요. 말썽부려서 혼나도 5초 멈칫.” 설악산처럼 크고 튼튼하라고 이름 붙인 덕일까 난생처음 참여해본 기자회견에서도 설악이는 ‘스타 기질’을 발휘했다. 낯선 장소와 사람들에 처음엔 긴장했지만, 청와대로 행진을 시작하자 누구보다 먼저 꼬리를 높이 세우고 앞장섰다.

“예뻐해 주고 칭찬해주니까 신이 났었나 봐요. 설악이가 너무 빨라서 뒤에선 참가자들이 못 쫓아올 정도였어요.” 물론 철저한 연습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예민씨는 설악이의 스트레스를 고려해 기자회견에 앞서 이틀에 한 번씩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연습 산책을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기자회견에 참여한 이유가 뭘까.

22일 낮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동물단체들이 ‘개도살 식용금지’ 집회를 열고 청와대에 공개서한을 전달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더 많은 설악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요. 제 또래 친구들, 많은 반려인들이 개도살 식용금지라고 하면 강한 구호에 거부감부터 가져요. 설악이는 식용개였던 당사자잖아요. 설악이를 보면 여느 반려견이랑 다르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개농장, 도살장에서는 설악이 같은 개들이 죽어 나가고 있을 거잖아요. 알리고 싶었어요. 이 아이들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대통령에게 공개서한까지 전달한 ‘셀럽’ 설악이의 최근 소식은 설악이 인스타그램(@iamseorak)을 통해 볼 수 있다. 제인 구달,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국제 저명인사 37명이 서명한 ‘개도살 식용금지’ 공개서한의 연대 서명도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에서 계속 진행중이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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