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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모를 그리는 화가의 자기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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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0-07-30 11:20
수정 2020-07-30 14:35

[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35. 쒸구, 다람쥐와 청설모

인류의 회화사 자체가 곧 수피(獸皮)의 착취사였다. 적어도 지구 곳곳, 경향각지의 미술관, 박물관들의 벽면과 창고에는 동물들의 죽음과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클립아트코리아
녀석은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저에게 위협을 가한 사람을 아직껏 만난 적이 없어 그런지 모른다. 그렇다고 언제나 편안히 응대하는 느긋한 성격도 아니다. 실은 반대여서, 어떤 조바심 같은 것이 녀석의 행동에 배어 있다. 하지만 더 시간을 들여 살펴보니, 늘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한번은 녀석과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는 게임을 한 적도 있었는데,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쪽은 뜻밖에도 내 쪽이었다. 내가 녀석에 대한 선입견을 거둔 것은 그때였다.

산책길에서 다람쥐나 청설모를 만난 경험은 그리 대단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경험은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경험일 수도 있다. 문제는 어떤 소중한 만남의 경험을, 그 경험의 결과물일 사물이나 풍경에 관한 심상을 어떻게 오래 간직할 것인가, 어떻게 자기 생애의, 영혼의 일부로 변환할 것인가이다.

19세기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아름다운 무언가를 간직하고 싶다면, 그림을 그리거나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거나 쓰는 동안 우리는 그 대상을 의식에 새기며 알게 되고, 그럴 때 비로소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Alain De Botton, ‘The Art of Travel’, Kindle, Loc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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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모 그림엔 무엇이 담겼나

청설모를 즐겨 그렸던 19세기 중국의 승려인 쒸구(虚谷, 1824~1896)가 지구 반대편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 사람 존 러스킨을 알았을 리 만무하지만, 쒸구는 러스킨의 지침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다. 군인으로 살다 훗날 승려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 중국 화가는 아마도 산책길에서 만났을 여러 동물과 식물, 탑, 어부 같은 대상을 지면에 그려 넣었는데, 그가 가장 애호한 동물은 청설모였다.

쒸구, 청솔모 연작
쒸구는 붓을 옆으로 뉘여 그리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는데,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서툴고 소박한 감이 배어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의 화폭에는 방달한 기상이 은근히 묻어 있다. 그의 그림에는 18세기나 19세기의 중국 청화 도자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파인(Fine)’ 아트의 완벽미나 화려미 같은 것이 전혀 일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파인 아트를 못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파인 아트의 이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추정 없이, 붓의 옆면을 일부러 사용했던 그의 선택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나는 이 승려 화가가 테크닉(technik)’을 경계함, 열심(熱心)을 멀리함, 소박함을 지킴 같은, 예술창작과 생활에 공통되는 자신만의 원칙을 고집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어쨌거나, 쒸구의 그림에서 우러나는 소탈해서 시원한 미감은 청솔모라는 동물 자체가 주는 미감과 꽤나 닮았다. 가장 청설모스러운 청설모 그림이랄까. 그의 그림 속에는 청솔모가 아예 들어와 있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느낌 때문인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중국 승려의 청설모 연작에 반해 있다.

애정하는 동물을 지면에 옮기고 있는 화가는 대체로 자기배반적 인간이기 쉽다. 쒸구를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화가들이 썼고, 쓰고 있는 화필에는 제 목숨을 강탈당하고 털을 갈취당한 숱한 동물들의 비명과 억울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클립아트코리아
왜 그토록 청설모를 많이 그렸지? 같은 질문은 필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동물이나 식물은 각별한 존재로 다가오는 법이고, 이 중국 승려에게는 청설모가 그랬을 뿐이다. 어쩌면 같은 집을 점유하지 않았을 뿐 그에게 숲길에서 만나는 청설모들은 생애의 동반자, 즉 반려(伴侶)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에게 청설모는 존재와 예술의 미학의 준거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은 내가 지금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화가를, 그이의 동물 사랑을 소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만은 아님을 아셔야 한다. 그보다는 어느 중국 화가의 청설모 그림을 예로 삼아 인간의 모순을 지적하려는 매우 불순한 목적으로 여기까지 당신의 눈길을 끌고 왔음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애정하는 동물을 지면에 옮기고 있는 화가는 대체로 자기배반적 인간이기 쉽다. 쒸구를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화가들이 썼고, 쓰고 있는 화필에는 제 목숨을 강탈당하고 털을 갈취당한 숱한 동물들의 비명과 억울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미술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은 펄쩍 뛸지 모르나, 인류의 회화사 자체가 곧 수피(獸皮)의 착취사였다. 적어도 지구 곳곳, 경향각지의 미술관, 박물관들의 벽면과 창고에는 동물들의 죽음과 고통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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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 대신 다람쥐

서양, 동양이라는 개념은 더없이 미욱한 개념이지만, 이걸 전제하고 말하자면 (왜 동양은 그리도 넓은 땅의 여러 문화권을 아우르는가?) 이른바 서양에서 회화용 붓의 털, 호(毫)를 만들 때 가장 인기 높았던 털은 족제비 털이었다. 즉, 호 제작 과정에서 가장 무참히 희생된 동물은 족제비들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희생 동물의 목록은 결코 앙상하지 않다. 염소, , , (귓털을 썼다), 돼지, 낙타처럼 길들인 동물들, 늑대, 오소리, 너구리, 몽구스, 토끼 같은 야생 동물들이 두루미술사의 제단에 제 피를 뿌렸다. 톱 클라스 모필은 러시아 콜린스키(kolinsky) 지역에 서식하는 족제비(그래서 이름이 콜린스키다) 털로 제작되었다. ‘품질’을 기준으로 동물의 등급과 가격, 동물 수요(사냥과 축산의 규모)가 결정되었다.

자, 쒸구 스님의 청설모 그림으로 되돌아와 보자. 중국화에 소용된 화필의 털, 그 원소유자들은 누구였을까? 족제비는 북반구 대부분 지역에서 서식하니 북반구 동쪽에서도 선호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보다는 염소(부드러운 화필의 털)나 돼지, , 오소리, 사슴, 토끼(딱딱한 화필의 털) 같은 동물이 선호되었다고 한다.

서쪽과 비교하여 동쪽의 특이점은 심지어 개, 고양이 같은 사람에게 친근한 동물이나 학처럼 신성하게 여겨졌던 동물마저도 가차 없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붓에 대한 욕구가 동쪽에서 더 맹렬했던 걸까?

다람쥐는 어떨까?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있지만, 족제비 대신 다람쥐였다. 가성비가 좋아 인기가 높았고, 지금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게다가 다람쥐털은 미술용 붓만이 아니라 메이크업용 붓에도 쓰이고 있고, 각종 의류 제품으로도 제작되고 있다.

다람쥐 털이나 말의 털로 만든 회화용 붓들. 인터넷 쇼핑몰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어떤 독자는 ‘지금 붓 만드는 것까지 시비할 셈이냐?’라며 필자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인간이 동물의 가죽과 털을 사용한 역사는 문명의 역사보다도 길고, 이것을 ‘착취’의 역사라 부르는 건 섣부른 언설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행동이 착취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역사적 실태를 먼저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간 인류가 근사한 미술관을 만드느라 얼마나 많은 족제비와 늑대와 다람쥐들의 삶을 절단냈는지 그 수치를 가늠해본 후에 착취라는 단어가 용법에 맞는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미술용품 산업, 화장품 산업의 공급 체인의 하나로 운영되어온 늑대 농장’, ‘돼지 농장’, ‘다람쥐 농장의 실태를 살펴보고 나서 그 여부를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부터 나도 동네 숲에서 만났던 다람쥐를 그림에 담아볼까 한다. 존 러스킨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함이고, 허곡(쒸구의 한국어 발음) 스님의 청설모 사랑을 본받고자 함이다. 그림 그리기란 ‘참으로 나를 만나는’ 활동인 ‘오티움(otium)’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다람쥐를 그려가는 내 손에 어느 다람쥐의 죽음이 들려 있다면 어떨까? 그 죽음이 야생에서 살다 포획된 누군가가 아니라 처음부터 감금틀 안에서 감금되어 있다가 때 되어 목이 잘린 누군가의 죽음, ‘공급 체인 위의 죽음’이라면 어떨까? 지금 아마존(amazon.com)에서는 다람쥐 털로 만든 최고급용 캘리그래피 용 붓이 28.49달러에 판매되고 있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작가

쒸구, 청솔모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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