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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성장의 신화, 압축침체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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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5-09-10 18:55
수정 2015-09-11 15:31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6일 청와대에서 ‘경제 재도약을 위해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침 햇발]

박근혜 대통령은 답답하다. 꿈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가 맞닥뜨린 잿빛 현실을 지켜보고 있자니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그래서 ‘노동개혁’에 온 힘을 쏟겠노라 주먹을 불끈 쥔다. 철밥통처럼 일자리를 꿰찬 소수의 ‘특권’을 없애야만 우리의 딸·아들에게 꿈을 되찾아줄 수 있을 텐데. 답답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하다. 낡은 패러다임의 시효가 끝났음을 익히 알고 있다. 요즘은 물적 생산요소의 투입량만 늘린다고 경제가 쑥쑥 성장하는 게 아니잖나. 그렇기에 전국 곳곳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만들었고, 개소식 때는 오해를 무릅쓰고 달려가 투자를 약속한 재벌 총수들에게 격려를 잊지 않았던 건데. 억울하다, 정말.

꿈. 자본주의는 꿈을 먹고 자란다. 꿈이 없다면 자본주의란 이름의 기관차는 단 한걸음도 내달리지 못한다. 창의성. 우리 시대의 생산함수는 더 이상 자본과 노동의 구식 조합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어떤 멋진 이름을 끌어대건 간에 사회 전체의 지적·문화적 역량의 총합을 나타내는 무형의 요소가 경제성장에 끼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박 대통령의 답답함과 억울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싶다. 꿈과 창의성을 외치는 박 대통령의 머릿속엔 정작 가장 중요한 소프트웨어가 탑재돼 있지 않아서다. 바로 ‘자본주의 성장 경로’라는 큰 그림이다.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이란 말을 이럴 때 써야 하는 건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간에 경제성장의 비밀을 하나의 요인만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정치적 리더십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수도 있고, 더러 대외환경이나 부존자원 등이 중요한 변수일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초조건’의 중요성만큼은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다. 자본주의란 기초조건이 평등할수록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속성을 지녔다. 경제성장의 속도도 훨씬 빠르다. 식민지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비교적 ‘평등한’ 조건에서 산업화를 시작한 우리의 경험이 잘 말해준다.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체제를 전환한 나라들의 초기 성장 속도가 눈부신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평등할수록 빨리 성장하되, 성장할수록 되레 불평등을 낳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남는 건 더 이상의 성장을 방해하는 ‘임계치’를 하릴없이 넘어서느냐, 아니면 직전 순간에 방향을 트느냐의 선택이요 결단이다. 자본주의의 지난 역사는 불평등이 임계치에 다다를 무렵이면 어김없이 불평등을 줄이려는 대수술이 뒤따랐음을 보여준다. 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여태껏 수명을 연장해온 비결이다.

최근 정부가 새해 예산안을 발표했다. 정부는 복지예산 비중이 역대 최고 수준이라 내세우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전체 예산 증가율이 낮아진 데 따른 착시효과일 뿐이라서다. 그나마 정책적 의지를 가지고 수혜 대상이나 수준을 확대한 것도 아니다. 소득 재분배를 위한 증세 등을 통해 세입을 늘릴 생각을 애초부터 차단해 놓고는 돈줄만 쥐어짠 데서 비롯된 뻔한 결과다.

최우성 논설위원
한국의 경제성장 역사는 흔히 ‘압축성장’의 신화로 받아들여진다. 수출 대기업 밀어주기도, 노동자 임금 쥐어짜기도, 모두가 비교적 평등했기에 역동적 성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성장의 대가를 치르기라도 하듯 불평등이 극도로 심해진 상태다. 토양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는데도 예전 방식대로 씨 뿌리고 농사짓는다면 땅을 완전히 망가뜨릴 뿐이다. 꿈과 창의성을 살리기는커녕 아예 말살하기 딱 십상이다. 박 대통령 스스로 ‘박정희 신화’를 배신하는 행위이자, 머릿속엔 압축성장의 기억을 안고 두 다리는 ‘압축침체’를 향해 돌진하는 최악의 한 수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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