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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본소득 논쟁 가닥잡기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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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02-23 13:38
수정 2021-02-26 14:43

이원재 ㅣ LAB2050 대표

‘모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제가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런데 아쉽게도 기본소득 논쟁이 정치공학적 입씨름 수준을 넘지 못하는 느낌이다. 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키려면, 최소한 다음 세가지 질문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며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첫째, 4차 산업혁명의 속도는 얼마나 빠를까?

기본소득제는 경제구조 전환을 염두에 두고 제안된 제도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의 역할 변화가 핵심이다. 자동화가 점점 심화되고 다양한 노동에서 인간의 역할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동의한다. 문제는 그 변화의 속도가 어떨 것인지, 그리고 한국적 특수성이 얼마나 나타날 것인지다.

한국은 제조업 국가이므로 변화가 느릴 것이며, 상당 기간 전통적 고용을 중심으로 경제를 운용할 수 있다는 관점이 있다. 또한 자영업은 쇠퇴할 것이지만 여기 종사하는 사람들은 기업 고용으로 흡수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자면 기본소득제를 도입하기보다는 고용과 연계된 전통적 복지제도를 강화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제조업 기업이 성공한다 해도 이런 전통적 고용은 확대되기 어렵다는 관점도 있다. 변화가 너무나 빠른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변화도 더 빠르게 맞닥뜨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제처럼 새로운 분배제도의 취지에 공감하게 된다.

둘째, 돈벌이에 매달리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는 바람직할까?

기본소득제 반대 주장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취업 여부와 관계없이 지급되는 기본소득제가 게으른 사회를 만들고 말 것’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논리적 결함이 있다. 기본소득제는 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제도이므로, 기본소득을 받기 위해 돈벌이를 그만둘 유인이 약하다. 오히려 전통적 복지급여인 실업급여나 생계급여는 취업하면 중단되거나 깎인다. 기본소득제가 아니라 전통적 복지체제를 갖고 있는 유럽이 맞닥뜨린 높은 실업률이 바로 이 ‘게으른 사회’ 문제다.

그럼에도 기본소득 게으름이 자꾸 연결되어 거론되는 이유는, 사실 우리 내면의 정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취업해 돈을 벌어오는 활동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돈벌이 윤리’가 강하게 내면화된 사회다.

기본소득제 도입은 이런 윤리적 기준을 흔들 수 있다. 예컨대 가사노동과 사회봉사도 취업해 출퇴근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고, 여가 역시 필수적인 활동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기본소득제를 선호할 것이다.

셋째, 늘어나는 재정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끊임없이 기본소득제가 국가재정 파탄으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반대 논리가 나온다. 그러나 기본소득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정부 재정은 계속 커지고 있다. 20여년 전 100조원이던 정부 예산이 이제는 500조원을 넘어섰고, 당분간 더 커질 전망이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IMF)이 지적했듯이, 최근 다른 국가들의 재정확장 속도와 비교하면 한국은 아직 재정지출 여력이 크다. 이 여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더 깊이 논의해야 한다.

사실 재정은 목적이 아니라 기능이다. 우리 사회는 필요한 일이 있다면 재원은 어떻게든 동원해 투입해왔다. 경부고속도로도, 전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도, 초고속 인터넷망도, 기초연금과 아동수당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기본소득제 비판을 하더라도, 이 세가지 질문을 놓고 좀 더 정교하게 토론하면 좋겠다. 무턱대고 ‘게으름을 불러온다’거나 ‘나라 곳간 거덜 낸다’는 식의 비판은 게으르고 거칠다.

물론 기본소득제 도입 주장 역시 더 정교해져야 한다. 무엇보다 기본소득제는 소비를 촉진하므로 그 자체가 중요한 경제정책이라는 의견에는 무리가 있다. 기후악당국가로 지목되는 우리 경제 상황에서, 생산 방식을 전환하지 않은 채 소비만 촉진한다면 이는 올바른 경제정책 방향이 되기 어렵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분명 우리 사회가 만들어내는 연간 1900조원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가치가 잘 생산되어야 나눌 몫이 생긴다.

5년 뒤 우리는 지금을 어떻게 평가할까. 기본소득제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린 태도로 깊이 있는 토론을 하며 의사결정을 함께 내릴 수 있다면, ‘위기 속에서도 현명한 대처로 우리 삶을 한 단계 높인 시기’로 평가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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