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방글라데시에서 외신을 타고 날아온 짧은 소식.

방글라데시의 영원무역 공장에서 벌어진 시위 중 여성 노동자 1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영원무역은 홍보대행사를 통해 짤막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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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최저 임금 인상을 집행하던 과정에서, 조정된 임금체계를 오해한 일부 근로자들의 시위 중 경찰의 발포로 1명의 근로자가 사망하고 10명 내외가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또한 다수의 이웃마을 불량배들이 공장에 침입하여 내부를 파괴하고 집기와 2-3,000족의 수출 대기 중인 신발을 약탈해 갔습니다. 당사는 1/11 (토)에 공장 내부를 수리 청소하고 1/12 (일)부터 조업을 재개키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오며 여러분들의 너르신 이해와 협조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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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이웃마을 불량배, 유감… 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고, 영원무역은 비슷한 해명을 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번번이 ‘오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의류봉제업이 진출한지 30년이 넘도록 이 나라의 최저임금은 어떻게 여전히 100달러를 넘지 못하는가? 불과 8개월 전 라나플라자 건물 붕괴 사고로 1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숨진 나라에서 경찰이 어떻게 노동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는가?

 

대다수 언론은 같은 시기 캄보디아의 의류노동자 시위에서 공수부대가 여러 노동자들을 사살한 사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단 1명이 죽은 영원무역과 방글라데시는 그렇게 잊혀질 것만 같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풀기 위해 류이근, 유신재 두 기자가 약 한 달 동안 방글라데시 치타공과 다카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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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특권, 거짓말: 글로벌 패션의 속살

방글라데시 치타공의 한국수출가공공단(Korea Export Processing Zone)에서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제조업체로 유명한 영원무역 소속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1980년 처음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영원무역은 1999년 정부로부터 치타공 땅 500ha를 1400만달러에 매입해 방글라데시 최초의 민간 수출가공공단을 조성했다. 현재 방글라데시에서 의류 신발 등 17개 생산법인과 1개 항공사를 운영하며 약 6만8000명을 고용하고 있다. 세계 2위 의류 수출국 방글라데시의 최대 외국인투자기업, 세계 최대 규모의 스포츠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기업으로 꼽힌다. 류이근 기자

1. 10달러의 대가

 

예부터 벵골과 펀자브에서 나는 쌀로 인도를 먹여살린다는 말이 내려왔다. 벵골의 나라란 뜻인 이곳 방글라데시는 갠지스강 하류의 넘쳐나는 물과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가 어우러져 삼모작이 가능한 풍요로운 땅이다. 하지만 누구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한국수출가공공단에는 현재 영원무역 계열 공장들만 입주해있다. 공단 경비 역시 영원무역이 고용한 경비업체가 맡고 있다. 경비실 옆 철문에 ‘18세 미만 고용 금지’라는 문구가 영어와 벵갈어로 적혀있다.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저개발국가의 공장에서 아동노동은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문제 가운데 하나다. 류이근 기자

파빈 악터가 일했던 영원무역 신발공장 내부 모습. 관리자나 재단사 등 일부 직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여성이다. 영원무역의 최대 바이어는 노스페이스 등의 브랜드를 소유한 브이에프시(VFc)다.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노스페이스 제품의 약 40%를 영원무역이 생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나이키, 퓨마, 엥겔베르트슈트라우스, 랄프로렌 등도 주요 바이어다. 류이근 기자

나시마는 언니가 총을 맞아 숨진 공장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다. 언니가 죽은 뒤 며칠 동안 나시마는 작업대에서 울기만 했다고 공장 동료들은 말했다. 나시마는 “무섭지만 밥을 찾는 ‘나쁜 배’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나시마는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류이근 기자

땅 한 뙈기 없던 파빈의 아버지는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었다. 릭샤(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를 몰기도 했지만, 두 해 전 세상을 떴다. 늙고 병든 엄마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즈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외국 공장이 들어섰다. 사람을 뽑는다기에 여동생 나시마가 줄을 서 면접을 봤다. 나시마는 면접 사흘 만에 봉제일을 시작했다. 없는 돈을 쪼개 치타공 시내까지 나가 학원에서 미싱을 배운 게 도움이 됐다. 나시마는 다달이 6000타카(약 8만원)를 벌어 왔다.

 

나시마 덕에 엄마와 네 남매가 세 끼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됐지만, 집안 형편이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아픈 엄마는 병원은 고사하고 약국조차 갈 수 없었다. 3000타카(약 4만원) 넘는 빚은 쉬이 줄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도맡던 파빈도 지난해 9월부터 돈을 벌러 나섰다. 동생 나시마의 추천으로 어렵지 않게 같은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나라에선 주로 친인척이나 친구의 추천을 받아 사람을 쓴다.

 

파빈은 올해 스물한 살이다. 이곳 여성들은 보통 이 나이면 결혼하지만, 파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딸은 엄마 곁을 지키려 했다. 파빈은 엄마에게 “시집 안 갈래. 엄마랑 같이 살 거야. 내가 돈을 벌게”라고 말하곤 했다. 파빈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한두 달 더 공장에 다니면 동생처럼 헬퍼(보조)에서 오퍼레이터(미싱사)로 올라갈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외국계 기업인 영원무역 공장에 다니는 것도 자랑스러웠다.

 

지난 1월9일, 파빈은 여느 때처럼 새벽 5시30분께 눈을 떴다.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7시께 동생과 집을 나섰다. 자매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기다리던 월급날이다. 둘은 얼마 전 총리가 방송에 나와 “1월 월급분부터 최저임금이 인상된다”고 한 발표를 들었다. 각자 월급이 1000타카(1만3000원) 넘게 오를 것으로 잔뜩 기대했다. 파빈은 동생한테 “빚도 조금 갚고, 엄마를 의사한테 모시고 가자”고 말했다. 떨어지는 쌀도 급했다. 자매는 어느새 제복을 입고 긴 총을 멘 경비들이 지키고 서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정문을 통과했다.

 

파빈은 7번, 나시마는 6번 공장으로 빨려들어갔다. 7번 공장에서 파빈은 퓨마(Puma) 브랜드 운동화를 만들었다. 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의 제조업체로 유명한 한국 기업 영원무역은 노스페이스뿐만 아니라 나이키, 퓨마 등 수많은 스포츠, 아웃도어 브랜드들에 오이엠(OEM·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의류와 신발 등을 납품한다. 스포츠, 아웃도어 오이엠 업체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아직 헬퍼인 파빈은 서른명이 한 조로 일하는 작업대 맨 끝에서 하루 250~300켤레씩 쏟아져나오는 신발의 삐져나온 실밥을 잘라냈다. 흘러내린 본드도 깔끔하게 뜯어냈다.

 

갓 만들어진 신발이 내뿜는 독성에 종종 눈이 아렸다. 일할 때는 화장실에 가지 않는다. 가는 데만 4분이 걸리니, 볼일을 보려면 10분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조장이나 매니저한테 갖은 욕설을 듣느니, 아침 8시30분부터 점심때까지 참는다. 파빈은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오래 참아야 한다. 헬퍼의 점심시간은 오퍼레이터 등 다른 노동자들보다 2시간 늦은 오후 2시부터 딱 30분 동안이다. 몇 달 더 일해 오퍼레이터가 되면 파빈은 동생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

 

11시께, 기다리던 월급 명세서가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약 3800타카(약 5만원)이던 이전 월급에서 700타카(약 9300원)밖에 오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월급날이 보통때보다 4~5일 늦어질 때부터 수상했다. 수당이 문제였다.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 방침에 따라 회사는 기본급을 올렸다. 대신 의료비 등 수당을 확 줄였다. 총액이 파빈이 기대했던 금액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공장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리자들이 기계를 세웠다. 12시, 점심시간이 되자 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밥을 먹지 않은 채 공장 앞 빈터에 모여들었다. 회사 쪽 연락을 받았는지 경찰도 이미 공단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경찰이 무리 속 두 남자를 불러 세웠다.

 

“당장 공장 안으로 들어가, 다시 일을 시작해.” 두 남자는 “올린 월급을 주기 전엔 못 들어갑니다” 하며 버텼다. 그러자 경찰이 이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품질검사를 담당하는 하룬이 나서서 경찰을 말렸다. “우리가 기계를 부수거나 공장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는데 왜 때립니까?” 그러자 경찰은 “네가 노동자 대표냐”며 하룬의 멱살을 잡고 검문소 쪽으로 끌고 가 폭행했다. 흥분한 노동자들이 경찰 쪽으로 몰려갔다. “하룬을 풀어줘라, 때리지 마라.” 당황한 경찰이 최루탄을 쏴댔다. 눈을 따갑게 쏘는 연기가 노동자를 순식간에 흐트러뜨렸다. 노동자들이 벽돌을 깨 던지기 시작했다. 나시마는 바닥을 빠른 속도로 휘젓는 최루탄의 불꽃이 행여 옷에 옮겨붙을까 무서워 종종걸음으로 허둥대며 다시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두고 온 히잡을 챙겨 언니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무슬림 여성들은 머리에 히잡을 두르지 않고 밖에 나가지 않는다.

 

“탕, 탕, 타당!” 밖에서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터졌다.

 

공장 밖으로 뛰쳐나온 나시마의 눈에 언니 파빈의 모습이 들어왔다. 언니는 바닥에 누운 채 다른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총알이 파빈의 머리를 관통했다. 병원이 있는 치타공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카르나풀리강 다리를 건너기 전 파빈의 심장은 더는 뛰지 않았다.

 

파빈은 결국 네번째 월급을 받지 못했다.

 

 

 

2010년 12월 영원무역 공장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치타공수출가공공단(CEPZ)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1995년 처음 최저임금을 정한 이후 2006년, 2010년, 2013년 딱 세 차례 인상했다. 매번 인상폭이 클 수밖에 없다. 회사는 전체 인건비 상승 부담을 각종 수당을 깎아서 최소화한다. 그래서 기본급을 뼈대로 한 최저임금이 올라도 임금은 크게 오르지 않는다. 큰 폭의 임금 인상을 기대한 노동자들과 충돌을 빚기 일쑤다. AFP/연합

2. 사라진 노동자들

위: 평상시 치타공수출가공공단(CEPZ)의 퇴근길 모습. 방글라데시 정부는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모두 8개의 수출가공공단을 조성했다.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의 자본이 들어와 의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외국 자본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공단 내 노조 설립을 법으로 막는 것이다.

 

아래: 치타공수출가공공단 안에 영원무역의 통근버스가 줄지어 주차돼있다. 차체가 온통 찌그러진 방글라데시의 보통 버스와 달리 깨끗한 모습이다. 영원무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 버스를 탈 수 있는 건 아니다. 이 버스들은 영원무역 간부 전용이다. 류이근 기자

2010년 12월 노동자 테러사건의 배경이 된 치타공수출가공공단 내 영원무역 YSL 공장 입구. 류이근 기자

영원무역 YSL 공장에서 일어난 테러사건 목격자 슈리가 자신이 입던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 공장에서 봉제공으로 일하던 슈리는 테러사건이 일어난 다음달 노동자들의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류이근 기자

<한겨레>가 만난 목격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2010년 12월 치타공에서 일어난 충돌로 인한 사망자는 영원무역 노동자 여럿을 포함해 10명이 훌쩍 넘는다. 하지만 당시 현지 언론은 릭샤꾼을 포함해 최대 5명이 숨졌고, 사망자 가운데 영원무역 노동자는 없다고 보도했다. AP/연합

 

3년 전에도 월급날이었다.

 

파빈이 일하던 한국수출가공공단에서 카르나풀리강을 건너 차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치타공수출가공공단(CEPZ)이 위치하고 있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공장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다. 2010년 12월11일, 재단사 마슈는 여느 때처럼 출입문짝도, 후미등도 없는, 찌그러진 냄비처럼 곳곳이 파인 고물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했다.

 

치타공수출가공공단 정문 앞에 8시쯤 내려 영원무역 공장까지 걸어갔다.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전날 퇴근할 때 받아 든 월급 명세서가 못마땅하긴 했다. 최저임금이 오른다는 정부 발표에 좋아했는데, 막상 손에 쥔 월급은 5400타카(약 7만2000원)가 안 됐다. 기대했던 액수보다 500타카(약 6700원)가량이 적었다.

 

‘결근도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일했는데…’

 

하지만 공장 안에 있는 누구도 불만을 섣불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괜히 나섰다가 해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 일 없이 오전이 지나갔다. 경찰이 경비실에 와 있는 게 이상하긴 했다. 전엔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제대로 오르지 않은 월급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한 친구가 마슈한테 주의를 줬다. “괜히 월급 갖고서 이러쿵저러쿵하지 마. 사장도 할 만큼 한 거야. 잘못 말했다간 우리만 손해봐.” 대화는 금세 끊겼다. 회사도 단속에 나섰다. “동요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서로 월급 얘기하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나를 찾아와라.” 누구도 이 말을 한 관리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나, 한 여성의 목소리가 출입문 쪽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밖에서 투쟁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여기서 뭣 하고 있는 거냐. 밖으로 나가자. 안 그러면 기계를 때려부수겠다.” 여성의 손엔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놀란 건 노동자들보다 회사 쪽이었다. 관리자들이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와 기계를 세웠다.

 

마슈는 동료들과 공장 밖으로 나갔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영원무역의 와이에스엘(YSL) 공장 앞에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5층짜리 와이에스엘 공장에서는 영원의 대표 제품인 노스페이스 의류를 만든다.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이다. 노동자들이 “우리 대표들이 안에 갇혀 있다. 협상을 하러 갔는데 아직까지 내려오지 않고 있다. 어디 있는지 찾아봐달라”고 말했다.

 

마슈는 10여명의 남자들과 함께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화분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공장 안 기계들은 멀쩡해 보였다. 4층으로 올라갔을 때, 한 사무실 캐비닛 안에서 세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한테 맞았는지 온몸이 멍들어 있었다. 마슈는 숨만 겨우 내쉬는 이들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두 노동자가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둘 다 양쪽 팔목과 발목이 깊게 베였다. 피가 흥건했다.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들것을 만들어 옮겼다. 와이에스엘에서 오랫동안 오퍼레이터로 일해온 슈리와 그의 동료들도 이를 목격했다.

 

마슈의 공장과 달리 와이에스엘 공장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애초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은 노동자들은 9시30분께 기계를 세웠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를 설득해 기계를 다시 돌렸다. 재봉틀이 점심 뒤 또다시 멈추자, 회사 쪽은 “파업을 이끄는 대표가 누구냐”고 다그쳤다.

 

모든 수출가공공단(EPZ·Export Processing Zone) 안에서는 노조 설립이 사실상 금지돼 있다.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오랜 선물이다. 노조가 없는 공장에 노동자 대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회사 쪽은 다섯명을 지목해 위층 관리자 사무실로 불렀고, 그들은 제 발로 내려오지 못했다.

 

마슈는 테러로 중상을 입은 노동자들을 공단 정문 앞까지 옮겼다. 삼륜 택시인 시엔지(CNG)를 불러 세워 부상자들을 싣고 치타공대학병원으로 보냈다. 마슈는 “시엔지에 태울 때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병원에 테러를 당해 실려온 이들의 의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마슈는 다음날 아침에도 평상시처럼 출근했다. 8시 전에 공단에 도착했지만,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다른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아내만 들어갔다. 경찰은 사원증을 확인해 영원무역 노동자들만 통과시키지 않았다. 영원무역의 또다른 공장 와이에스에스(YSS)의 품질검사관 미루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정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공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영원무역 노동자가 금세 수천명으로 불었다. 전날 와이에스엘 공장에서 있었던 노동자 테러 사건과 제때 제대로 받지 못한 월급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키웠다. 노동자들은 수출가공공단을 관리감독하는 총리실 산하 투자청(BEPZA) 건물 정문을 부쉈다.

 

갑자기 경찰이 최루탄을 쐈다. 총도 이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픽픽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다. 대테러부대 랩(RAB)도, 군인인 국경수비대(BGB)도 경찰에 섞여 있었다. 군경은 골목으로 달아나는 노동자까지 쫓아가 총으로 쐈다. 미루 옆에 서 있던 남자도 총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는 세명의 주검을 릭샤밴(짐수레를 단 자전거)에 실었다. 다른 곳에 있던 마슈도 세명의 주검을 릭샤밴에 올렸다. 마슈는 “이곳저곳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을 릭샤밴에 실어 어디론가 운반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안와르는 아침까지 공단 정문 앞에 함께 서 있던 사촌동생을 밤늦게 치타공대학병원에서 만났다. 영원무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생은 냉동고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와르가 병원에서 본 주검만 또다른 영원무역 노동자를 포함해 여덟이었다.

 

2010년 12월12일, 방글라데시와 전세계 언론은 치타공수출가공공단 노동자 시위 진압 과정에서 릭샤꾼을 포함해 최대 다섯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희생자 가운데 영원무역 노동자는 없다고 했다. 마슈, 미루, 안와르가 목격한 많은 주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중 마슈는 지금도 영원무역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익명이다. 다음날 서울에서 영원무역은 기자들에게 ‘영원 치타공 공장, 괴한들에게 공격받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잘못 이해해 불거진 사태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불순세력이 공장을 무단 점검해 기물을 파손했다는 내용이었다. 파빈이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다음날인 2014년 1월10일 영원무역이 낸 보도자료의 내용도 엇비슷했다.

 

파빈의 죽음에 영원무역 주가는 당일 잠시 하락했으나 이내 회복했다. 서울 여의도 한국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영원무역의 주가는 1월9일 전날에 견줘 4.5%가량 하락했지만, 이후 상승 추세를 이어가다 1주일 만인 1월16일엔 사고가 있기 전보다 높은 3만8750원으로 뛰었다. 파빈의 죽음을 부른 최저임금 인상을 심각하게 보는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인건비 상승 요인이 있다고 봤다. 방글라데시의 임금은 조금 더 오른다 해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애널리스트들은 대규모 생산능력과 품질경쟁력을 갖춘 영원무역이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비용 증가를 글로벌 바이어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투자자들에게 영원무역 주식의 매수를 권했다.

 

지난 3월 중순께 만난 나시마는 언니가 총을 맞아 죽은 공장에서 여전히 미싱을 돌리고 있었다. 언니가 죽은 뒤 처음 며칠 동안은 작업대에서 울기만 했다고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샤르민이 말했다. 나시마는 “무섭지만 밥을 찾는 ‘나쁜 배’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나시마는 혼자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공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전과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시위 뒤 수당 삭감은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잔업이 사라졌다. 그래서 6000타카(약 8만원)이던 나시마의 월급은 최저임금 인상에도 500타카(약 6700원) 오르는 데 그쳤다. 공장은 기존 생산량을 유지하면서도 잔업을 없애 임금 인상 부담을 덜었다. 나시마는 예전에 10시간에 하던 일을 지금은 8시간 안에 마쳐야 한다고 했다. 나시마는 “점심시간이 30분에서 15분만 더 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기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도 편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거리 곳곳에는 ‘긴급행동대대(Rapid Action Battalion)’를 홍보하는 입간판이 서있다. 여느 나라에서 군대나 경찰 등의 홍보물은 보통 입대지원자 모집을 위한 것이지만, 이 입간판들은 이 특수부대의 역할을 강변하고 있다. 영문 앞글자를 따 흔히 ‘랩(RAB)’이라고 불리는 이 부대는 원래 테러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창설됐지만, 노동자들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유신재 기자

3. 재봉틀의 작동원리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서 인건비가 싼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록 최저임금이 월 100달러를 넘지 못하는 현실은 ‘수요-공급의 법칙’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기업들이 누리는 저임금의 혜택은 더 높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환경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를 철저히 짓밟는 폭력 탓에 가능하다.

폐차장에서 되살아나온 듯한 승용차와 버스, 3륜 택시 ‘시엔지’(CNG), 자전거를 개조한 인력거 릭샤, 차창에 매달려 구걸하는 거지. 조야한 기계와 남루한 사람들이 뒤엉킨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도로는 좀체 속도를 내기 힘들다.

 

렌터카 뒷좌석에 지루하게 앉아 있는데 차창 밖이 소란스럽다. 교통경찰이 릭샤꾼에게 고함을 지른다.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릭샤를 옮기라는 뜻인 것 같다. 곧이어 교통경찰이 릭샤꾼의 뺨을 힘껏 올려붙였다. 따귀를 맞은 릭샤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릭샤를 옮겼다.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이방인에게 통역과 현지 안내를 맡은 레자는 “저 정도면 착한 경찰”이라고 말했다. “고문금지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찰이 채찍으로 릭샤꾼을 때리는 것도 흔히 볼 수 있었어요.” 방글라데시 의회가 고문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가난한 시골 출신 남자들이 릭샤를 끈다. 한 번 손님을 태울 때마다 10~20타카(약 130~260원)를 받아 하루 200타카의 대여료를 내고 남는 돈이 수입이다. 40만대에 이르는 릭샤가 다카에서 경쟁한다. 더 좋은 목을 지키려고 고집을 피우다 경찰한테 따귀를 맞는다.

 

가난한 시골 출신 여자들이 의류공장에서 일한다. 월 5300타카(약 7만원)의 최저임금은 도시의 집세와 식비 등 생활비를 대기에도 빠듯하다. 조금 더 높은 월급과 나은 노동환경을 요구하고 나서는 의류노동자들은 따귀를 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2010년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경찰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의류노동자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어린이를 발길로 차고 있다. 다카/AFP 연합뉴스

치타공의 번화가 아그라바드 지역 노점에서 한 남자가 ‘슬레진저’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장당 200~250타카, 약 3000원에 팔고 있다. 이른바 ‘짝퉁’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진품을 사려면 ‘싱가포르 마켓’으로 가야 한다. 서울 세운상가 같은 오래된 건물에 작은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허름한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점포 안에는 타미힐피거, 갭, 리바이스, 캘빈클라인 등 유명 글로벌 브랜드 제품이 가득하다.

 

‘아즈미르 컬렉션’이라는 점포의 점원이 이방인을 반기며 타미힐피거 티셔츠를 권했다. 1000타카, 우리 돈으로 약 1만3000원이다. 반강제적인 권유에 옷을 입어보다 “짝퉁 아니냐”고 묻자 점원은 펄쩍 뛰었다. “수출가공공단(EPZ·Export Processing Zone) 안쪽에 줄이 닿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서 물건을 떼오는 거예요. 정말이에요. 물건이 필요하다고 전화하면 갖다줘요. 공장에서 그때그때 남은 물건을 갖다주는 거라서 같은 브랜드가 계속 나오진 않아요.”

 

다른 점포에서는 모자가 달린 노스페이스 겨울 점퍼도 눈에 띈다. 겨울에도 최저기온이 영상 10℃ 밑으로 거의 떨어지지 않는 이곳에선 도무지 입을 일이 없는 옷이다. 영원무역 공장에서 나왔다는 점퍼의 가격은 3500타카, 약 4만6000원. 한국에서 팔리는 가격의 10분의 1 수준이다. 이곳의 최대 고객은 치타공 항구에 잠시 정박한 외국인 선원들이다. 한 점포 주인은 중국인, 한국인 선원들이 한번에 수십벌씩 사간다고 귀띔했다.

 

수출가공공단 출입구에서는 경찰이 밖으로 나가는 차량을 세워 트렁크 속까지 검사한다. 수출품이 내수시장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를 뚫고 물건을 밖으로 빼돌릴 수 있는 건 ‘마스탄’이다. 벵골어로 ‘근육질 남자’라는 뜻인 마스탄은 조직폭력배를 말한다. 영원무역에서 오랫동안 관리직으로 일했던 여성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그들이 물건을 빼돌린다. 그들은 여러가지 일을 한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인터뷰를 꺼렸다. 인터뷰 섭외를 도와주던 노동자가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에서 온 기자랑 인터뷰했다고 이웃에 사는 동료가 회사에 찌를 수 있어요. 그러면 회사는 마스탄을 시켜서 가만 놔두지 않죠. 5~10명이 한밤중에 들이닥칩니다. 다들 무기를 갖고 오기 때문에 주민들도 말릴 수 없어요.”

 

다카 인근의 한국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몇시간 뒤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우리가 얘기한 걸 공장에 가서 다시 확인하면 우리가 위험해져요. 회사 관리자가 마스탄 40명 정도를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린 이 동네에서 쫓겨나고, 공장에서 해고돼요.” 또다른 한국계 공장의 노동자는 끝내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 지역의 노동단체 활동가는 “노동자들 대부분 시골에서 온 외지인이다. 같이 힘을 합쳐서 마스탄과 맞서지도 못한다. 그래서 더 두려워한다”고 설명했다. 치타공의 노동운동가 시디굴 이슬람은 “마스탄은 공장에서 견본품이나 불량품, 자투리 원단 등을 받아서 여러가지 사업을 한다. 공장에서 연락을 받으면 노동자들이 시위를 못하게 폭행하고 협박한다. 마스탄은 경찰, 정당과 다 연결돼 있다. 노동자들이 신고해도 경찰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조사해온 현지 여성단체 우비니그의 파리다 악터 사무처장은 “마스탄을 빼고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을 얘기할 수 없다. 그들이 공장주의 사주를 받고 노동자들을 선동해 폭력적인 시위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불만이 쌓여 있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조직된 시위를 벌이기 전에 우발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경찰이 들어와서 진짜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노동자들을 잡아가는 식이다. 일종의 ‘선제적 대응’이다”라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2010년 10월 “산업 분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산업경찰(Industrial Police)을 창설했다. 의류공장이 밀집한 다카, 가지푸르, 나라얀간지, 치타공 등 4개 도시에 배치했다. 산업경찰은 오직 의류산업 분야를 맡는 경찰 조직이다.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과 함께 성 회장의 전용기를 타고 영원무역 베트남 공장을 다녀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샤히둘리 아짐 방글라데시의류제조수출협회(BGMEA·Bangladesh Garment Manufacturers & Exporters Association) 부회장은 “우리나라는 경찰이 충분치 않다. 고속도로만 담당하는 고속도로순찰대처럼 산업만 전담하는 경찰을 만들어달라고 협회가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때론 노동자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공장을 부순다. 자산과 공공의 안전을 위해 경찰을 투입해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수출공단에 들어가면 헬멧과 방패, 곤봉으로 무장한 산업경찰을 쉽게 볼 수 있다. 샤히둘리 부회장은 “산업경찰은 경영주와 노동자 양쪽을 모두 보살핀다. 소요가 일어나면 중재자 역할을 한다. 경영진의 잘못도 산업경찰이 처리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산업경찰은 2010년 12월 치타공 영원무역 공장에서 일어난 테러사건을 막지 못했고,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도 못했다.

 

‘해송’이라는 이름의 의류공장을 운영하며 방글라데시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윤희 사장은 “정부가 2010년 산업경찰을 만들고 장비도 보강하고 큰 집회를 못하게 한다. 시위가 일어날 기미가 보여 우리가 연락하면 산업경찰이 공장으로 출동한다. 산업경찰청장이 시위장비 구입 등을 위해 한국을 두 번인가 방문했다. 그는 지한파다. 한국 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다카에서 만난 또다른 ‘랩(RAB)’ 홍보 입간판. 2010년 다수의 노동자들이 숨진 영원무역 시위 때도 랩이 투입됐다. 휴먼라이츠워치, 앰네스티인터내셔널 등 국제 인권단체들은 법을 뛰어넘어 살인을 일삼는 랩을 ‘살인부대’라고 규정하고, 랩의 살인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주방글라데시 한국대사관은 지난 연말 랩에 한국인 기업인들의 의류공장을 보호해달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유신재 기자

1970년 11월21일치 <경향신문>에 실린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 사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의류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1970년 11월13일 평화시장 앞 시위에서 자신의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동우(65)씨는 1970년대 초반 인천 부평구 한국수출산업공단에서 스웨터를 짜는 편직공이었다. 공장은 100% 일본계 투자 기업인 삼원섬유 소유였다. 보통 하루 13~16시간 일했고, 선적 날짜를 맞추기 위한 24시간 철야 작업도 자주 있었다.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대가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연장근로수당도, 휴일근로수당도 없었다. 모두 근로기준법 위반이었다. 6일 일하면 1일 쉬어야 했지만, 회사는 한달에 쉬는 날을 2번으로 줄였다. 유씨는 “그조차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쉬는 날이 많았다. 추석과 설 연휴를 빼곤 거의 연중무휴였다. 그때 결근하면 바로 잘렸다.”고 회상했다.

노조 설립은 헌법적 권리였지만, 군부 독재 정권은 외자유치를 위해 수출산업공단 내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다. 유씨가 우여곡절 끝에 공단 내 외국인투자기업 최초의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노동자들은 1973년 12월 파업을 벌였다.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부평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끊임없이 유씨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회사는 파업을 주도한 그를 끝내 해고했고,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 유씨를 구속했다.


유씨는 당시 노동자들을 “산업노예”라고 표현했다. 그는 하루 600~700원, 월 1만5000원에서 2만원을 벌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대개 하루 300~400원을 벌었다. 유씨는 “안 먹고, 안 쓰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었다. 방값과 쌀값 등을 빼면, 버티기 힘든 수준의 임금이었다. 남자들보다 임금이 낮은 여성들은 야식으로 끼니를 때워 쌀을 아꼈다. 그 때문에라도 여성들은 철야·잔업·연장 근로를 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60~70년대 한국은, 지금의 방글라데시다. 의류 노동자였던 한국인들의 후예는 이제 세계 2위 의류 수출국 방글라데시의 최대 외국인 투자자로 변신했다. 과거 일본인이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한국인들이 방글라데시에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아래 만든 옷을 전세계로 수출해 돈을 벌고 있다.


유씨는 방글라데시 등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나 노동자 사망사건을 전하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나도 한때 같은 노동자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뭔가 한심하기도 하고, 때론 분노가 일기도 한다.” 류이근 기자

지난 3~4월 다카에서는 크리켓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1947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던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크리켓이다. 대회가 있는 날 저녁은 여느 때보다 더 길이 막혔다. 렌터카가 검정 픽업트럭과 나란히 정차했다. 검은색 두건과 검은색 선글라스, 검은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작은 체구의 방글라데시 남성들과 달리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이었다. 사내들의 어깨에는 보통 경찰들이 메고 다니는 나무 재질의 장총이 아니라 자그마한 검정색 자동소총이 달려 있었다. 사내 가운데 한 명이 고개를 빼고 렌터카 안을 굽어봤다. 레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카메라 내려놔요. 쳐다보지도 마요.” 넉살이 좋아 쉼없이 농담을 하는 운전기사 아지물도 굳은 표정으로 앞만 바라봤다. 갈림길에서 검정 픽업트럭이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 때까지 약 3분 동안 렌터카 속 세 명은 숨을 죽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색 사내들의 공식 명칭은 ‘긴급행동대대’(Rapid Action Battalion). 영어 머리글자를 따 흔히 ‘랩’(RAB)이라고 부른다. 랩은 2001년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한다는 명분으로 2004년 창설됐다. 경찰, 군, 국경수비대에서 선발된 최정예 요원들로 구성됐다.

 

2008년 7월26일 저녁 여든살 노파 노베라 카툰이 다카의 제니다 프레스클럽 앞에 섰다. 이곳은 방글라데시의 정당, 엔지오, 노동단체들의 단골 기자회견 장소다. 노파는 “아들이 죄를 지었다면 ‘크로스파이어’하지 말고 기소해달라”고 호소했다. 내과의사인 아들 미자눌 라흐만 투툴은 전날 랩에 잡혀갔다.

 

이곳 노동자와 활동가들과 대화하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크로스파이어’(crossfire)였다. 이상하다 싶어 일부러 사전을 찾아봤다. ‘십자포화’ 또는 ‘교차사격’. 전쟁터에서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을 뜻하는 명사다. 방글라데시에서 이 단어는 새로운 용법을 얻었다. 랩에 잡혀간 많은 사람들이 체포 며칠 뒤 총에 맞아 숨졌다. 주검에는 총상뿐 아니라 으레 시퍼런 멍자국이 있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랩은 ‘범죄자가 크로스파이어 과정에서 숨졌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이미 체포된 범죄 용의자가 랩 요원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고, 이에 대한 랩의 대응사격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2010년 사이 이렇게 숨진 사람이 랩의 공식집계로만 622명. ‘크로스파이어’란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총살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가 됐다. 내과의사 미자눌은 노모의 기자회견 이튿날 ‘크로스파이어’됐다. 불법 공산주의 정당의 지도자였다는 게 그의 혐의였다.

 

랩은 노동자들의 시위에도 투입된다. 총격으로 여러 노동자들이 숨진 2010년 영원무역 공장 앞 시위에도 랩이 투입됐다. 영원무역 재단사 마슈(가명)는 랩에 대해 “처음에는 말로 협박한다. 안 들으면 때린다. 그래도 안 되면 공포탄을 쏜다. 그래도 안 되면 사람들한테 총을 쏜다. 무서운 존재다”라고 말했다. 휴먼라이츠워치와 앰네스티인터내셔널 등 국제 인권단체들은 랩을 ‘살인 부대’(killing squad)라고 지탄한다. (바로가기)

 

지난해 말, 주방글라데시 한국대사관은 랩과 군 정보국(DGIF)에 협조를 구했다.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 시위가 벌어질 경우 산업경찰이나 지역 경찰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테니, 랩과 군 정보국이 방글라데시 최대 투자국인 한국의 기업인들이 운영하는 의류공장들을 보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랩과 군 정보국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낸 한국대사관은 한인 공장주들에게 공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연락하라고 안내했다.

 

돌이켜보면 의류산업은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자본과 국가가 합작한 ‘폭력’에 기대어 성장해왔다. 대량생산 방식의 의류산업을 가능케 한 것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었다. 18세기 발명가들이 면직기를 선보이면서 옷의 재료가 되는 면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기술혁신으로 생산능력을 키운 영국 자본은 기존에 비해 엄청난 양의 원재료, 즉 면화를 필요로 했다. 당시 대규모로 면화를 생산해낼 수 있는 땅은 신대륙의 미국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이 넓다 해도 저절로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미국 남부의 드넓은 목화농장에서 흑인 노예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다음은 여성들의 차례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로 흘러든 여성들이 주로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여성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단체행동을 꾀한 여성들의 시도는 경찰 등 국가권력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세계 여성의 날’의 뿌리인 1908년 3월8일 미국 뉴욕 럿거스 광장 시위의 주축이 여성 봉제공이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1만500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조 결성의 자유,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행진을 벌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11년 3월 뉴욕 맨해튼의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라는 대형 봉제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비상구는 밖에서 잠겨 있었고, 9층 높이까지는 소방차의 물줄기가 닿지 않았다. 모두 146명의 노동자들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하거나, 창문으로 뛰어내려 숨졌다. 대부분 10대와 20대 여공들이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기록된 이 사건은 서구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와 꼭 닮은 화재가 101년 뒤인 2012년 방글라데시 타즈린패션 공장에서 되풀이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친 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거리가 훌쩍 멀어졌다. 서구의 소비자들을 위해 전후 일본이, 뒤이어 한국이 글로벌 의류산업의 생산기지를 맡았다.

 

1960~70년대 우리나라 봉제공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1970년 11월13일 재단사 전태일이 시위 도중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목숨을 끊으며 고발한 바 있다. 여성 봉제공들에 대한 폭행이나 성추행은 상습적으로 일어났다. 군부독재 정권은 국가 최대 수출산업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았다. 노동쟁의가 일어난 공장에는 공장주가 고용한 깡패 또는 경찰이 즉각 투입됐다. 기업과 노동부, 정보기관이 협력해 노조 설립을 시도한 노동자들의 정보를 모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들의 재취업을 봉쇄했다.

 

지구 반대편으로 멀찍이 밀려난 생산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서구 사회는 무심했다. 전태일의 후예 또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청계피복노조는 1981년 1월 서울시장으로부터 노조 해산 명령을 받았다. 청계피복노조는 한국의 노동 탄압 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미국을 기반으로 한 노동단체인 ‘아시아 아메리카 자유노동기구’(AAFLI) 한국사무소를 점거했다. 마침 전두환이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중이었다. 청계피복노조는 방한중인 이 단체 본부장 모리스 팔라디노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곧이어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 사건으로 11명이 구속됐고, 노조는 와해됐다.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르고 민주주의가 진척되자 글로벌 의류산업의 생산기지는 중국으로 옮겨갔다. 중국의 임금이 오르자 베트남,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등으로 옮겨갔다. 이들 나라의 임금도 오르자 방글라데시, 인도, 캄보디아, 미얀마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갭(GAP), 에이치앤엠(H&M), 자라(ZARA), 유니클로(UNIQLO) 등의 브랜드로 대변되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 의류산업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난 1월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의류 노동자들을 군인들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있다. 이날 최소 5명의 노동자가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신화/뉴시스

올초 임금인상 시위 중 총상을 입은 캄보디아 의류노동자 프룸 피롬(22)과 누이가 프놈펜의 크메르-소비에트 친선병원 병실에 잠들어 있다. 피롬은 카나디아 공단의 한국인 투자 의류공장에서 일했다. 김명진 기자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에 따라 잠깐 입고 버릴 값싼 옷을 생산하는 패스트패션의 시대에 노동자들의 권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철저하게 무시된다. 자본과 결탁한 제3세계 국가의 공권력은 자국의 의류 노동자들을 향해 서슴없이 총을 쏘고 있다. 지난 1월9일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영원무역 노동자 파빈 악터가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숨졌다. 그보다 1주일 앞선 1월2일 캄보디아에서도 공수부대와 경찰의 발포로 최소 5명의 의류 노동자들이 숨졌다. 민주노총, 시민단체, 공익법무법인 등으로 구성된 ‘기업과 인권 네트워크’는 캄보디아 유혈사태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에서 “심지어 유엔 대표부 앞에서까지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비무장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공격한 점은 캄보디아 정부가 자국민의 인권 수호 책임을 철저하게 방기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정부가 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호보다 사용자와 의류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압도적인 힘의 열세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체념한다. 지난 1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의 총에 숨진 파빈 악터의 어머니 카툰은 오열하며 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운이 없어서 죽었다”고 말을 맺었다. 노동자들을 때리는 경찰을 말리다 ‘노동자 대표’로 몰려 두들겨맞아 시위의 기폭제가 된 품질관리담당 모하메드 하룬은 “회사나 경찰 누구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불만 없다. 시위 이후 우리 요구대로 회사가 임금을 올려줬다. 어쩌면 그게 사과다”라고 말했다. 총에 맞아 큰 부상을 입은 노동자들, 산탄총을 맞은 노동자들이 수두룩하지만 보상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머리를 다친 봉제공 쇼히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얻게 됐다. 그래서 침묵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10여년 동안 일하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마숨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는데,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포기가 빠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방법으로 통제되는 저임금 덕분에 소비자들은 값싼 옷을 입는다. 영국의 바이어와 방글라데시의 여러 공장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는 한 에이전트는 “영국에서 담배 1갑이 7파운드(약 1만2000원)다. 그런데 티셔츠 1장이 5파운드이고, 남성 속옷 4장을 묶어서 4파운드에 판다. 모든 물가가 다 올라가는데 옷값만 내려간다”고 말했다.

 

 

 

2013년 4월24일 다카 외곽 사바르에서 8층 높이 라나플라자 건물이 무너져 최소 1129명의 의류노동자가 숨졌다. 그로부터 8년 전 62명이 스펙트럼스웨터 공장 건물이 무너져 62명이 숨졌다. 1990년 이후 방글라데시 의류공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건물붕괴 사고만 23건에 이른다. 이 사고들로 1750명의 의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는 인명사고는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신화/뉴시스

4. 안전한 비즈니스

아무리 사람이 죽어나가도 처벌받는 사람은 없다. 세계 2위 의류수출국 방글라데시의 의류공장은 노동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자리이고, 공장주들에게는 안전한 비즈니스다.

라나플라자 붕괴 당시 건물 안에서 작업중이던 달리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함께 일하던 동생 폴리는 그러지 못했다. 달리아가 폴리의 사진을 앞에 둔 채 사고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다. 유신재 기자

다카 고등법원 건물은 영국 식민지 시절 총독 관저로 지어졌다. 이 나라의 사법부는 의류공장을 운영하는 기업인 등 특권층의 범죄를 처벌하는 데 매우 무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유신재 기자

2012년 11월24일 화재로 최소 112명의 의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은 타즈린패션 공장 앞으로 릭샤가 지나가고 있다. 화재 이후 공장 건물은 폐쇄됐다. 유신재 기자

방글라데시의류제조수출협회(BGMEA) 건물은 이 협회와 협회 회원들이 누리는 초법적 특권을 상징한다. 온갖 법률을 무시한 채 지어진 이 건물에 대해 법원은 철거명령을 내렸지만, 명령이 집행될 기미는 없다. 유신재 기자

수마야의 아버지가 죽은 딸을 위해 기도해줄 ‘이맘(이슬람교의 지도자)’을 기다리고 있다. 타즈린패션에서 일하던 수마야는 불길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지만 암을 얻었고, 지난 3월21일 16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유신재 기자

2013년 4월24일, 공장 앞은 어수선했다. 전날 휴가중인 달리아에게 조장 슈문이 전화를 걸어와 건물 벽에 금이 많이 가 수리하느라 공장이 하루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이날은 공장 문을 열지 어쩔지 몰랐지만, 노동자들은 무단결근으로 불이익을 받을까 두려워 일단 8시까지 출근을 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건물 안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노동자들에게 팬텀어패럴 생산책임자 이무란이 소리를 쳤다.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출근 보너스’를 못 받는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들은 노동자들의 지각과 결근을 막기 위해 ‘출근 보너스’를 준다. 보통 월 200타카(약 2600원)인 출근 보너스를 받으려 달리아와 동생 폴리는 매일 아침 30분씩 부지런히 걸었고, 늦잠이라도 잔 날이면 아깝지만 15타카를 내고 릭샤를 탔다. “월급에서 지각 벌금으로 1000타카(약 1만3000원)를 깔 수 있다. 월급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이무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건물주 소헬 라나까지 나타났다. “건물은 안전하다. 작은 금이 있었고, 어제 기술자들이 와서 고쳤다. 문제없으니까 들어가라.” 공장장들과 마스탄(폭력배)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왔다. 팬텀어패럴 공장장 자말이 “대량선적물량 마감이 닥쳤다. 빨리 일해야 된다”고 소리쳤다.

 

나흘 전 토요일 잔업까지 마친 자매는 3일짜리 휴가를 받았다. 폴리의 맞선을 위해 아버지와 두 자매는 네프로코나의 고향 마을로 향했다. 달리아 가족이 고향을 떠나 다카 교외 사바르로 이사한 것은 2008년이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가구점이 망했고 15만타카(약 200만원)나 되는 큰 빚을 얻었다.

 

이사온 다음날부터 달리아는 이모의 손을 잡고 의류공장에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눈치가 빠르고 손이 야무진 달리아는 일을 빨리 배웠다. 한달 반 만에 보조 딱지를 떼고 재봉틀을 잡았다. 2000타카(약 2만6000원)로 시작한 월급은 공장을 옮길 때마다 올라 팬텀어패럴에서는 9000타카를 받았다. 2010년 폴리도 언니를 따라 팬텀어패럴에 합류했다. 폴리도 일을 시작한 지 한달 만에 재봉틀을 잡았다.

 

야채 노점상을 하던 아버지도 “알라의 도움으로” 곧 집 근처 시장에 야채가게를 냈다. 가족은 4년을 부지런히 일해 빚을 모두 갚았다. 이제 각각 스물셋, 스물둘이 된 딸들의 결혼을 생각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폴리의 신랑감은 같은 고향 출신의 군인이었다. 유엔 작전에 자원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군인은 방글라데시에서 선망의 대상이다. 그제껏 사진 속 폴리만 본 군인은 다행히 신붓감을 마음에 들어했다.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달리아와 폴리는 팬텀어패럴, 뉴웨이브, 에더텍스 등 3개 공장 노동자 3000여명과 함께 상점과 은행 등이 모두 대피한 건물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갔다. 건물 4층, 약 130명이 일렬로 앉아 일하는 C라인에서 자매는 약 25미터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 영국의 패스트패션 브랜드 ‘프라이마크’ 티셔츠를 만들기 위해 재봉틀을 돌렸다. 재봉틀은 곧 멈췄다. 정전이었다. 전력 사정이 안 좋은 방글라데시에서는 매일 서너번씩 전기가 나간다. 이윽고 건물 층마다 설치된 발전기가 커다란 소음과 진동을 일으키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업이 재개되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굉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달리아의 시야를 가렸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바깥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회색 먼지를 뒤집어쓴 몸 곳곳이 욱신거렸다. 팔과 무릎에서 피가 났다. 눈을 들어보니 공장이 있던 8층 높이 라나플라자 건물이 주저앉아 있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달리아를 발견한 낯선 사람들이 달려와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달리아는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아직 먼지가 가라앉지 않은 잔해 주위를 기어다니며 외쳤다. “폴리, 폴리.”

 

코린트식 기둥 위에 돔형 지붕을 얹은 현관, 긴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원, 흰 대리석 바닥이 특징인 다카 고등법원은 유럽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충실히 따른 건축물이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05년 동벵골(지금의 방글라데시)과 아삼(지금의 인도 북동부 지역)을 통치하는 총독의 관저로 지어졌다.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이 나라에서 홍차와 황마 등을 헐값에 가져간 서구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노동력으로 생산된 옷을 헐값에 가져간다.

 

라나플라자 붕괴 나흘 뒤인 지난해 4월28일 사이디야 굴룩을 비롯한 세 명의 여성 활동가들이 고등법원을 찾았다. 타즈린패션 화재사건 피해자들을 돕던 이들은 라나플라자 붕괴를 목격하면서 사고 책임자를 강력히 처벌하는 것만이 반복되는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라나플라자 붕괴로부터 꼭 5개월 전인 2012년 11월24일 다카 외곽 아슐리아 지역에 자리한 타즈린패션 공장에서 불이 났다. 3층까지만 짓도록 허가를 받은 건물은 9층까지 지어졌다. 1층에는 쉽게 불이 붙는 원단이 가득 쌓여 있었다. 비상탈출 계단은 없었다. 각 층 입구마다 설치된 철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다. 1층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5층까지 집어삼켰다. 쇠창살이나 대형 환풍기를 간신히 뜯어내고 뛰어내린 노동자들은 부상을 입었다. 그러지 못한 최소 112명의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이날 고등법원에 타즈린패션 화재 책임자들을 신속히 재판해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이들의 청원에 따라 고등법원이 심리를 연 5월30일, 화재 발생 반년여 만에 타즈린패션의 모기업인 투바그룹의 소유주 델와르 호세인이 처음으로 법정에 섰다. 법무장관 출신 변호사 피다 모하마드 카말이 변호를 맡았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법정에 나온 델와르 호세인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사이디야와 친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감옥에 보내겠다고? 너희는 나한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델와르 호세인의 태도는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의류기업인들의 이익단체인 방글라데시의류제조수출협회(BGMEA) 회원이었다. 현지 최대 규모 의류기업 중 하나인 모함마디 그룹의 루바나 헉 사장은 “델와르는 협회 고위층과 매우 가깝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타즈린 화재 직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타즈린패션 화재 하루 뒤 아슐리아 경찰서는 ‘신원미상’의 가해자들을 입건했다. 셰이크 하시나 총리까지 나서서 신속한 수사를 장담했지만, 이후 5개월이 넘도록 수사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의 80%를 의류산업이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 협회와 기업인들의 힘은 막강하다. 다카 시내 하티르질 호숫가에 서 있는 협회 본부 건물은 의류업계의 힘을 상징한다. 2008년 완공된 15층 높이의 유리 건물은 불법적으로 취득한 국유지 위에 지어졌고, 건축과 환경과 관련된 여러 법률을 위반했다. 2011년 고등법원은 이 건물을 철거하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굳건히 버티고 있다. 지난해 기준 공식적으로 방글라데시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29명이 의류기업 소유주다. 친인척이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는 이들까지 합하면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의류산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현지 노동단체들은 보고 있다. 1980년대부터 의류공장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조사해온 현지 여성단체 우비니그의 파리다 악터 사무처장은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 대부분 의류산업에 이해관계가 있다. 대다수 언론사도 의류산업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여성 활동가들의 청원에 따라 고등법원이 경찰을 압박했지만 델와르 호세인에 대한 수사는 더디기만 했다. 경찰은 화재 발생 13개월 만인 2013년 12월22일에야 델와르 호세인을 비롯한 13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델와르 호세인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지난 2월9일 아침, 여성 활동가 사이디야는 타즈린패션 생존자 수마야와 함께 병원에서 의료진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마야는 화재 당시 2층에서 뛰어내리는 과정에서 얼굴을 다쳤다. 그 직후 코에서 발생한 근섬유종양이 눈과 뇌까지 퍼졌고,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오전 9시30분께 사이디야는 법원에 출입하는 기자 친구로부터 델와르 호세인이 법원에 나타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도주한 뒤 발부된 구속영장에 대해 보석을 신청하러 온 것 같다는 게 기자의 설명이었다. 사이디야는 다른 활동가들에게 재빨리 소식을 알리고 릭샤에 올라탔다.

 

법정 안에는 거의 10명에 달하는 변호사들이 델와르 호세인을 변호하러 나왔다. 변호사 가운데 한명이 갑자기 외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치켜들었다. 노란색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 하늘색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 파란색 이탈리아 대표팀 유니폼이었다. 변호사는 “투바그룹이 피파(FIFA·국제축구연맹)로부터 브라질 월드컵대회 계약을 따냈다. 회장이 구속되면 계약대로 납품할 수 없을 것이다. 방글라데시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껏 비슷한 사건에서 다른 공장주들이 구속된 적이 없는데 왜 호세인만 구속되어야 하느냐’, ‘호세인이 아니라 공장 관리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도 잇따랐다.

 

그사이 언론사들은 인터넷으로 델와르 호세인의 보석신청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법정 안에 50여명의 기자가 모여들었다. 법정 밖에서 “사주를 처벌하라”고 외치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한참 동안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판사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보석을 기각한다.” 델와르 호세인은 법정구속됐다. 화재 발생 후 약 15개월 만이었다. 법정 안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법정 밖으로 나온 사이디야의 눈에 수백명의 시민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사주 처벌”을 끝없이 외쳤다.

 

사이디야는 “경찰과 지방법원은 워낙 부패가 심하다. 그래서 고등법원에 청원한 것이다. 그래도 솔직히 델와르 호세인이 보석으로 풀려날 거라고 생각했다. 1990년 사라카가먼츠 화재 이후 계속된 사고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공장주가 처벌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라나플라자 사건을 계기로 공장주들이 쉽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관행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른 것이었다. 라나플라자 건물주 소헬 라나는 사건 나흘 만에 이웃나라 인도로 탈출을 시도하다 국경 지역에서 체포됐다. 집권 여당인 아와미연맹의 지구당 간부인 그는 건축기준을 무시한 건물을 지어올렸다. 지난 3월24일 법원은 소헬 라나의 건축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보석을 받아들였다. 나머지 혐의에 대한 보석신청도 받아들여지면 소헬 라나는 형이 확정될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게 된다. 등을 떠밀다시피 노동자들을 위험한 건물로 밀어넣은 라나플라자 입주 공장 소유주 2명은 진작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지난 5일에는 타즈린패션 소유주 델와르 호세인이 수감 6개월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방글라데시의류제조수출협회는 사건 직후부터 델와르 호세인과 소헬 라나 등의 보석을 청원해왔다.

 

라나플라자 건물 잔해 속에서 달리아의 동생 폴리의 주검이 발견된 것은 사고 8일 뒤였다. 그사이 달리아의 가족은 폴리를 찾기 위해 신랑감에게 보여주려고 찍은 사진을 수천장 인쇄했다. 고향 마을에서 올라온 친척과 친구들까지 라나플라자 붕괴 현장과 병원, 수많은 주검이 안치된 학교 운동장을 뒤지고 다녔다.

 

희생된 의류노동자들에 대한 보상은 더디기만 하다. 지금까지 달리아의 가족은 지방정부로부터 장례비 2만타카(약 26만원), 총리실로부터 긴급지원금 10만타카, 바이어인 프라이마크로부터 4만5000타카 등 모두 16만5000타카(약 216만원)를 받았다. 폴리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은 언제 얼마를 받게 될지 모른다. 사건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전체 사망자가 몇 명인지 불분명하다. 현지 노동단체인 의류노동자연대 활동가 타슬리마 악터는 “주검이 발견되지 않은 실종자가 많다. 노동부, 군, 경찰이 저마다 다른 숫자를 내놓고 있다. 신원확인을 못하고 매장한 주검도 291구나 된다. 사망보상금 규모를 정하기 위한 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좀처럼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21개월 전 일어난 타즈린패션 화재 사망자들의 보상금도 아직 다 지급되지 않았다. 최소 112명의 사망자 가운데 주검이 확인된 99명의 유족들은 70만타카(약 910만원)씩 받았다. 진화에 17시간이 걸린 불길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주검은 재로 변했다. 유전자 감식으로 13명의 신원이 확인됐지만 이들에 대한 보상금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노동자 가족들을 상대로 2년 가까이 조사를 벌여온 사이디야 굴룩은 최소 12명에서 최대 23명의 사망자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족들을 대리하는 변호사 아사두자만은 이 화재가 단순한 산업재해가 아니라 고용주의 잘못으로 일어난 게 명백한 만큼 70만타카보다 훨씬 많은 보상금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타즈린패션 공장의 불길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지만 암을 얻은 수마야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지난 3월21일 숨졌다. 라나플라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달리아는 지난해 9월부터 또다른 의류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올해 초부터 인상된 최저임금 덕분에 팬텀어패럴에서보다 약 1000타카 많은 1만타카(약 13만원)를 월급으로 받는다. 하루아침에 1129명의 사망자와 2500여명의 부상자가 나온 마을에서 아버지의 야채가게는 장사가 예전 같지 않다.

 

 

 

1100여명의 사망자를 낸 라나플라자 붕괴 사건으로 서구 소비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저렴한 인건비로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제3세계 노동자들의 생명을 도외시한 글로벌 의류 브랜드들에 대한 비난이 최고조에 달했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일제히 방글라데시 공장 안전진단에 나섰다. 사진은 다카 인근 사바르의 한 의류공장에서 작업중인 노동자들의 모습. 유신재 기자

5. 바이어의 호텔

위: 수많은 인파와 차량, 릭샤로 붐비는 다카의 거리는 늘 시끄럽고 먼지가 자욱하다. 유신재 기자

 

가운데: 글로벌 바이어들이 머무는 특급호텔 웨스틴다카는 다카에서 매우 드문 쾌적한 공간이다. 유신재 기자

 

아래: 무장한 경찰과 경비원이 항상 웨스틴다카 호텔 앞을 지키고 있다. 이 호텔의 투숙객은 대부분 글로벌 의류브랜드 업체의 바이어들이다. 유신재 기자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참 많다. 자동차들은 수많은 행인과 릭샤를 뚫고 길을 내기 위해 쉼없이 경적을 울린다. 처음 다카를 방문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괴로워하는 게 차와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음이다. 거리의 소음은 건물 안까지 비집고 들어와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골목마다 낙엽과 쓰레기를 태우면서 올라오는 연기와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뒤섞인 공기는 들이쉬기 거북하다. 갖가지 장애를 호소하는 걸인들의 눈길은 마주하기도, 피하기도 불편하다. 얇은 옷쯤은 쉽게 뚫는 모기는 외국인의 피에 더욱 끌리는 것만 같다. 다카는 쾌적한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다카에도 예외가 있다. 상업지구인 굴샨 지역에 자리한 웨스틴다카 호텔은 전혀 다른 세계다. 승용차의 트렁크와 밑바닥까지 살피는 경비원,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 국제공항 수준의 보안검색대를 거쳐 로비에 들어서면, 이 도시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조용하고 세련되고 쾌적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이 ‘별 다섯개짜리’ 호텔의 하룻밤 숙박료는 약 400달러, 방글라데시의 중견 봉제공이 서너달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이만한 돈을 내고 이 호텔에 묶는 투숙객은 대부분 글로벌 의류 브랜드 기업에서 납품공장을 관리하는 임직원, 즉 ‘바이어’들이다.

 

지난 2월 호텔 회의실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갭(GAP)이 다음 시즌 생산 계획을 의논하는 회의를 열었다.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 온 임직원들과 갭 다카 연락사무소 직원들, 그리고 방글라데시 공장주 10여명이 참석했다. 갭 쪽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공장주들이 그동안 잘해왔다는 둥 앞으로도 함께 잘해보자는 둥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미국이나 영국에서 유학을 한 듯 영어가 유창한 젊은 공장주 한명이 다른 모든 공장주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납품가격을 인상해줄 수 있을까요?”

 

2013년 최소 1129명이 숨진 라나플라자 건물 붕괴 사건은 방글라데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서구의 소비자들이었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글로벌 패스트패션 브랜드 에이치앤엠(H&M)은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많은 의류를 납품받는 최대 바이어다. 스웨덴의 시민들은 카를요한 페르손 에이치앤엠 회장의 웃는 얼굴과 라나플라자 건물 잔해 앞에서 울먹이는 방글라데시 여성의 얼굴을 대비시킨 광고 포스터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서구의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세계 2위 의류수출국 방글라데시에서 제품을 공급받지 않는 유명 브랜드는 거의 없다. 서구의 ‘윤리적 소비자’들은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생명을 대가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글로벌 바이어들을 거세게 비난하고 나섰다.

 

에이치앤엠이 앞장서서 국제 노동단체 등과 손잡고 ‘방글라데시 화재 건물 안전 협정’(Accord on Fire and Building Safety in Bangladesh·이하 ‘어코드’)에 서명했다. 뒤이어 카르푸르(까르푸), 막스앤스펜서, 자라 등 유럽의 주요 바이어들이 동참했다. 갭, 월마트, 노스페이스 등 북미 지역의 주요 브랜드들도 ‘방글라데시 노동자 안전을 위한 동맹’(Alliance for Bangladesh Worker Safety·이하 ‘얼라이언스’)에 가입했다.

 

바이어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방글라데시 공장들에 대한 안전진단이 시작됐다. 어코드와 얼라이언스는 방글라데시 공장주들에게 방화문과 스프링클러 등 화재안전 설비를 갖추도록 요구했고,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공장에는 소속 바이어들이 일감을 주지 않도록 했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방글라데시 공장의 안전 확보를 위해 이처럼 조직적으로 나선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위해 바이어가 먼저 양보하겠다는 호의도 보였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의류노동자의 법정 최저임금을 3000타카에서 5300타카로 올렸지만, 공장주들은 큰 폭의 비용 증가를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이었다. 에이치앤엠 방글라데시 연락사무소의 데이비드 사브먼 사장은 지난해 12월 모든 납품공장들에 전자메일을 보냈다. 그는 “임금인상을 지지한다”며 “임금인상이 비용 증가를 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임금인상의 영향을 받는 모든 주문에 대한 납품가격을 조정하겠다. 이후 모든 주문도 새로운 최저임금에 맞춰 가격협상을 하겠다”고 썼다. 미국의 갭도 마찬가지였다. 갭은 지난 4월 <한겨레>에 보낸 전자메일을 통해 “갭이 납품공장의 임금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숙련되고 생산성이 높은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장주들이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공장주들이 법적 최저임금 또는 해당 지역의 산업기준에 맞는 임금 중 높은 금액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바이어들이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게 ‘불법 재하청’에 대한 태도다. 예전부터 글로벌 바이어들이 생산기지에서 일어난 사고로 인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되풀이해온 변명이 ‘불법 재하청’이다. 2012년 최소 113명의 의류노동자가 숨진 타즈린패션 공장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재 당시 타즈린패션 노동자들은 미국 월마트에 납품하기 위한 옷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 월마트는 이 공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발뺌했다. 곧 공장 잔해 속에서 월마트 브랜드 라벨이 붙어 있는 제품이 발견됐다. 그러자 월마트는 원래 계약을 맺은 ‘심코’라는 공장이 몰래 타즈린패션에 재하청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코는 주문물량이 너무 많아 월마트 쪽에 보고한 뒤 재하청을 준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월마트는 20년 넘게 거래해온 심코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거래를 끊었다. 이미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구에 도착한 심코의 이전 계약물량도 받지 않고 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결국 14개 라인을 운영하던 심코 공장은 현재 4개 라인만 가동하고 있고, 약 1500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라나플라자 붕괴사건 직후 스웨덴에서는 카를 요한 페르손 에이치엔엠(H&M) 회장의 얼굴사진을담은 포스터가 제작됐다. 이 포스터는 페르손 회장에게 ‘더 많은 패션 희생자가 필요하냐?’고 묻고 있다.

 

서구 소비자들의 압박에 에이치엔엠을 비롯한 글로벌 의류 브랜드들은 ‘방글라데시 화재 건물 안전 협정’(Accord on Fire and Building Safety in Bangladesh)과 ‘방글라데시 노동자 안전을 위한 동맹’(Alliance for Bangladesh Worker Safety)에 서명했다.

바이어들의 논리는 ‘우리와 직접 계약을 맺은 공장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는 것은 우리 책임이지만, 그 공장이 몰래 또다른 공장에 재하청을 주면 관리감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나플라자 붕괴 이후 불법 재하청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는 더욱 강경해졌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공장주들은 바이어들의 이런 태도가 위선이라고 말한다.

 

루바나 헉 모함마디그룹 대표이사는 “바이어는 납품공장의 생산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안다. 공장이 한가지 스타일을 10만개만 생산할 수 있는데 50만개를 주문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나머지 40만개는 누가 만들 것인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바이어들은 그런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바이어들은 그 이상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어들은 모두 납품공장의 시설안전과 근로조건 등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다. 바이어들은 이 기준에 맞는 공장들과 계약을 맺는다. 업계에서는 이런 공장들을 ‘5성호텔’에 빗대어 ‘5성공장’이라고 부른다. 5성공장은 바이어로부터 실제 생산능력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주문받는다. 초과 물량은 다른 공장으로 재하청된다. 흔히 ‘그림자공장’이라고 불리는 이들 공장은 시설과 임금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하다. 바이어는 그림자공장 덕분에 더욱 싼 가격에 제품을 구입한다. 하지만 바이어들은 그림자공장과 직접적 계약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피해 갈 수 있다.

 

방글라데시의류제조수출협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공장은 지난 4월 기준 4417개다. 등록되지 않은 공장에 대한 통계는 없지만 현지 기업인들은 2000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미등록 공장은 등록된 공장으로부터 재하청을 받아 운영된다. 등록된 공장 사이에서도 재하청이 일어난다. 재하청을 받은 공장이 또다른 공장에 재하청을 주는 일도 일어난다. 재하청이 거듭될수록 시설은 열악해지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낮아지고, 관리감독의 눈길은 멀어진다.

 

미국 뉴욕대학교 스턴경영대학원 비즈니스인권센터는 지난 4월 발간한 보고서(바로가기)에서 재하청이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의 핵심 요소라고 분석했다. 재하청 구조 덕분에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한다. 심코 회장인 무자파르 시디크는 “재하청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갭은 미국 매장 직원들의 최저임금을 시간당 7.25달러에서 10달러로 38% 인상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11일 뉴욕 맨해튼 미드타운의 갭 매장을 방문해 아내와 두 딸을 위한 옷 세 벌을 154.85달러를 주고 샀다. 그는 “(임금인상은) 직원과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전체 경제에도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원가 상승을 뜻할 뿐이다.

 

지난 2월 다카의 호텔 회의실에서 납품가격 인상을 기대하며 미국에서 온 갭 임원의 답변을 기다리던 공장주들은 이내 낙담했다. 이날 미팅에 참석한 한 공장주는 “납품가격을 올릴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높여서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 갭의 답변이었다”고 전했다. 또다른 공장주는 “바지의 경우 납품가격이 8~9달러이고, 미국 매장에서 판매되는 가격은 30~40달러다. 우리 인건비가 40% 올랐는데 어떻게 가격을 더 낮추라고 할 수 있나. 이건 비합리적인 압력이다. 갭 안에는 우리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 모든 직원이 가격을 더 깎는 것으로 자기 실력을 증명하려고 안달이 난 것 같다”고 말했다.

 

갭과 에이치앤엠에 모두 납품하는 한 공장주는 “에이치앤엠이 가격을 올려준 것은 그때뿐이었다. 그다음 시즌 계약부터는 가격이 예전 수준 또는 그 이하로 다시 내려갔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비용부담을 하겠다고 한 것은 언론에 보여주기 위한 쇼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파즐룰 헉 전 방글라데시고용주연합회 회장은 “바이어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항상 임금인상을 환영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비용을 분담해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한다. ‘임금이 오른 건 알겠는데,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공장들이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는 식의 말을 자주 듣는다. 그들은 캄보디아에 가면 ‘방글라데시가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한다’고 말할 것이다. 경쟁이 너무 심하다. 다른 나라 공장들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공장들끼리도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하고 있다. 바이어는 항상 경쟁을 이용한다”고 말했다.

 

 

 

서울 만리동 영원무역 건물. 영원무역의 최대 바이어는 ‘노스페이스’ 브랜드를 소유한 미국 기업 브이에프시(VFc)다. 영원무역은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전세계 노스페이스 제품의 약 40%를 생산하고, 한국에선 직접 판매하기도 한다. 연간 매출은 1조5000억원(연결 손익계산서 기준) 안팎으로 시가총액(발행 주식 총가치) 기준 국내 100대 기업 안에 든다. 이정아 기자

6. 어닝 서프라이즈

치타공을 끼고 흐르는 카르나폴리강이 벵골만과 만나는 하구에 방글라데시 최대 항구인 치타공 항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 나라에서 만든 옷은 이 항구에서 배에 실려 세계 각지로 수출된다. 류이근 기자

지난 1월 방글라데시 치타공 외곽에 있는 한국수출가공공단(KEPZ) 내 영원무역 공장에서 최저임금 인상 시위 도중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진 파빈의 어머니가 딸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류이근 기자

서울 만리동 영원무역 건물. 이정아 기자

 

카르나풀리강은 치타공을 끼고 벵골만으로 흘러들어간다. 강 서쪽 하구에는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큰 치타공 항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 나라에서 만든 옷을 외부로 내보내는 관문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방글라데시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은 의류를 수출한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원래는 치타공 항구 건너편이 국제항구였다.

 

천년 넘게 배가 드나들던 옛 항구 뒤쪽에 영원무역이 세운 한국수출가공공단(KEPZ)이 자리잡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드넓은 공단엔 공장 네댓개만이 휑뎅그렁하게 서 있다. 인구는 많고 땅은 비좁은 방글라데시에서 축구장 700개를 지을 수 있는 넓은 면적(산업용 땅 기준)을 외국 기업에 통째로 내준 것이다. 한때 비옥한 농지였던 공단 터 대부분이 아직까지 놀고 있다.

 

지난 1월9일, 이 공단 안 7번 공장에서 미싱보조사로 일하던 파빈 악터(21)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파빈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다. 치타공대학병원에 실려간 주검은 따라간 동생 나시마도 모른 채 부검이 이뤄졌다. 자정께 조그만 시골마을 근디빠라의 집으로 돌아온 주검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마을 이장과 회사에서 온 듯한 낯선 사람들이 “냄새가 날 수 있다”며 매장을 서둘렀다. 원래 망자를 곧바로 땅에 묻는 게 무슬림의 관습이지만, 한밤중의 매장은 드문 일이다.

 

파빈은 집 근처 ‘앵무새 연못’ 옆에 묻혔다. 어렸을 적 동생과 함께 멱도 감고 빨래도 하던 연못에는 앵무새들이 찾아왔지만, 큰 나무들이 잘려나간 지금은 오지 않는다. 장례를 치른 지 며칠 뒤에는 직책도 이름도 알 수 없는 회사 사람들이 파빈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파빈의 사원증과 월급명세서 등 서류를 몽땅 가져갔다. 집에 남은 파빈의 기록은 총에 맞아 쓰러진 모습을 담은 흐릿한 사진 한 장이 전부다.

 

파빈이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명세서엔 4500타카(약 6만원)가 찍혀 있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1000타카(약 1만3000원) 넘게 오를 것으로 기대했던 월급은 700타카(약 9300원) 인상에 그쳤다. 회사가 수당을 깎은 탓이었다. 파빈이 죽은 지 며칠 뒤에야 노동자들은 제대로 오른 월급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파빈은 월급을 받지 못했지만 그 가족은 회사에서 60만타카(약 803만원)를 보상받았다. 파빈의 어머니인 마제다 카툰이 평생 만질 수 없는 큰돈이었다. 그는 보상금을 손도 대지 않은 채 아는 사람에게 맡겼다. 이자가 나오지 않는 은행 계좌에 넣어뒀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 어떻게 보관되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카툰은 “딸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만, 돈이 나를 엄마라고 부를 순 없다”고 말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죽은 딸을 돈이 대신할 순 없다.

 

파빈이 출퇴근하던 길에 본도르바자르란 꽤 큼직한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자동차로 2~3분만 더 달리면 한국수출가공공단 정문 앞에 이른다. 마을은 아라칸왕조 전 고대 때부터 번성했던 곳이다. 예로부터 미얀마, 타이, 포르투갈, 스페인 등지에서 배를 타고 온 상인들이 드나들었다. 상인들은 이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과 보석, 동물 가죽, 상아, 향신료를 사갔고, 감자와 구아바, 파인애플 등을 전해줬다. 이제는 외지에서 온 공단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한다.

 

<한겨레>는 지난 3월 이곳에서 생활하는 영원무역 노동자 1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노동자들의 월급은 수당까지 모두 더해 평균 7350타카(약 9만8000원)였다. 그나마 최저임금이 인상되면서 지난해보다 늘어난 액수였다. 공단이 가동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경력은 대개 2년 남짓이었다. 응답자의 다수는 남성들로, 여성의 급여는 이들보다 더 낮은 수준이다. 노동자들은 보통 방값으로 1200타카(약 1만6000원)를 내고 있었다. 저축을 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3명뿐이었다. 저축액은 평균 410타카(약 5500원)에 그쳤다.

 

서울역에서 공덕역으로 넘어가는 만리재 중턱에 다다르면 오른편으로 노스페이스 로고가 박힌 커다란 인공암벽이 서 있다. 비록 암벽을 타는 사람을 볼 순 없지만, 세계 최대 스포츠웨어 주문자상표부착(OEM) 생산 업체의 알림판으로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암벽 왼쪽 8층짜리 건물엔 영원무역의 해외수출 부서가 자리잡고 있다. 경기도 성남에 본사로 쓰이는 비슷한 규모의 건물이 따로 있다. 만리재 건물 1, 2층에는 영원무역의 자회사인 영원아웃도어가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노스페이스와 에이글, 브로드피크, 골드윈 등 스포츠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까지 와서 옷을 사는 사람은 드물다. 매장은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떤 옷을 만드는 회사인지 보여주려는 전시장처럼 보인다.

 

지난 3월14일 오전 10시, 만리재에 있는 영원무역 건물 앞은 비교적 한산했다. 지하 1층에서 영원무역과 영원무역홀딩스의 주주총회가 잇따라 열렸지만, 주주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경비원과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주총장 출입을 통제했다. 이날 영원무역이 주총에서 통과시킨 의안 5건 가운데, 이사의 보수한도액 승인도 있었다. 사외이사 3명을 포함한 이사 8명의 보수지급 한도액은 올해 40억원이었다. 매년 그렇듯 회사가 낸 원안대로 안건이 승인됐다. 보수한도액은 전년도와 같은 액수였다.

 

전세계에 4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영원무역 그룹을 이끄는 성기학 회장은 지난해 주식회사 영원무역에서 16억원의 보수를 받았다. 그는 영원무역의 지주회사인 영원무역홀딩스에서도 19억원을 챙겼다. 이와 별도로 영원무역홀딩스 지분 약 17%를 갖고 있는 그는 11억5500여만원의 배당을 받았다. 성 회장은 그룹의 실질적 지주사인 와이엠에스에이(YMSA)에도 46%의 지분(2011년 말 기준)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비상장사여서, 열람 가능한(공시된) 감사보고서만을 봐서는 얼마를 배당했는지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방글라데시를 비롯해 다른 나라에 있는 계열사에서 성 회장이 얼마나 받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영원무역은 “회장이 방글라데시 계열사에서 대표이사 등 임원을 맡고 있지만 보수는 따로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공시로 확인 가능한 성기학 회장의 지난해 임금과 배당만도 한국수출가공공단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약 4000명의 연간 급여와 맞먹는다. 영원무역과 영원무역홀딩스가 3월 주총에서 통과시킨 주주 배당금은 모두 더하면 150억원이 넘는다. 1년 동안 주식을 보유한 대가로 주주들에게 지급된 보상이 방글라데시 1만2000여명의 연봉(1인당 약 120만원 기준) 총액에 해당된다.

 

방글라데시 치타공과 수도 다카 등지에 있는 영원무역 14개 계열사에서 일하는 6만여명의 노동자들은 연간 약 1조원어치 옷과 신발 등을 생산한다. 이는 영원무역 그룹 전체 매출의 절반이 넘는다. 인건비와 재료비 등을 다 빼고서 영원무역은 지난해 2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장사를 해서 돈을 얼마나 잘 버는지 보여주는 지표를 영업이익률(영업이익/매출)이라 하는데, 영원무역의 영업이익률은 15%가 넘는다. ‘방글라데시의 삼성전자’로도 불리는 영원무역은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률(13%)을 넘어섰다. 물건을 만들어 팔았을 때 남는 게 많지 않은(부가가치가 낮은) 탓에 후진국형 산업으로 불리기도 하는 의류산업에서 글로벌 브랜드의 하청업체가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내는 솜씨가 세계적인 첨단 정보기술(IT) 기업보다 나은 셈이다.

 

영원무역은 주생산기지인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10여명의 사상자가 나온 사건에도 불구하고 지난 1~3월(1분기) 깜짝실적을 거뒀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매출은 31%, 영업이익은 18%나 뛰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올해부터 시행된 최저임금 인상도 영원무역의 성장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은 것이다. 2010년 치타공수출가공공단(CEPZ)에서 영원무역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와 이튿날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뒤에도, 이 회사의 실적이나 주가는 꾸준히 상승세를 타왔다.

 

방글라데시에서 더 유명한 영원무역은 이제 한국에서도 점차 친숙한 기업이 돼가고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과 6호선이 교차하는 공덕역에 가면 지하 이동통로 벽에 ‘영원’ 광고판이 붙어 있다. 영원무역이 국내 판권을 갖고 있는 노스페이스의 광고모델은 배우 공효진, 이연희다. 영원무역이 지난해 우리나라 광고시장에 쏟아부은 돈은 215억원이 넘는다. 이는 방글라데시 노동자 약 1만8000여명의 일년치 임금과 맞먹는 액수다. 광고비가 늘어날수록 영원무역은 대중들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사실 영원무역은 오랫동안 ‘얼굴 없는 회사’였다. 노스페이스를 만드는 회사로 최근에 조금씩 알려지긴 했으나, 노스페이스란 브랜드의 주인은 미국에 따로 있다.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린즈버러에 본사를 두고 있는 브이에프시(VFc)는 뭘로 봐도 영원무역 한참 위에 있는 회사다. 브이에프시의 지난해 매출은 109억달러(약 11조원), 영업이익은 1조5000억원에 이른다. 영원무역의 대략 10배 규모다. 상표를 빌려주고서 받는 로열티 수입만도 연간 1조원이 넘는다. 브이에프시의 브랜드는 노스페이스 말고도 리(Lee), 잔스포츠(JANSPORT), 노티카(NAUTICA), 이스트팩(EASTPAK) 등 25개가 넘는다. 이 회사 최고경영자 에릭 와이즈먼은 지난해 130억원의 연봉을 챙겼다. 이 회사는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모든 노스페이스 제품의 40% 가량을 영원무역에 주문자상표부착 방식으로 맡겨왔다.

 

 

지난 3월14일 오전 10시, 만리재에 있는 영원무역 건물 앞은 비교적 한산했다. 지하 1층에서 영원무역과 영원무역홀딩스의 주주총회가 잇따라 열렸지만, 주주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경비원과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주총장 출입을 통제했다. 이날 영원무역이 주총에서 통과시킨 의안 5건 가운데, 이사의 보수한도액 승인도 있었다. 사외이사 3명을 포함한 이사 8명의 보수지급 한도액은 올해

영원무역은 브이에프시의 하청업체로 글로벌 의류산업 먹이사슬에서 최상위 바로 아래에 있다. 파빈이 영원무역 공장에서 만들던 퓨마(PUMA) 브랜드도 지난해 29억8530만유로(약 4조15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독일에 적을 두고 있는 이 글로벌 브랜드도 영원무역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이 회사는 26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거뒀고, 로열티 수입으로만 290억원을 챙겼다. 스페인의 자라(ZARA), 스웨덴의 에이치앤엠(H&M), 미국의 갭(GAP), 일본의 유니클로(UNIQLO) 등 글로벌 유명 브랜드들도 방글라데시 등 세계 곳곳에 영원무역과 같은 하청기업을 두고서 매년 10조~20조원대 매출을 올리고 있다.

 

방글라데시 다카와 치타공에는 브이에프시 등 영원무역의 글로벌 바이어(구매자)를 위한 아주 특별한 시설이 있다. 수도 다카에서 제2도시 치타공으로 가려면 다카국제공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국내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 한다. 비행기의 왼쪽 창가 쪽에 앉으면 이륙한 지 1~2분 새 다카공항이 발아래 놓인다. 그리고 잠시 뒤, 아리랑에어웨이라고 쓰여 있는 커다란 창고 건물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타공에서 이 항공사를 찾기란 더 쉽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공항 바로 왼편으로 항공사 건물이 서 있다. 영원무역 계열사인 이 항공사는 비행기 8대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바이어 등 귀한 손님을 싣고 수도 다카와 영원무역 공장이 있는 치타공 등지를 오가는 것이 비행기의 주요한 임무다. 영원무역은 “비행기는 업무용 전세기 사업, 긴급 의료 이송 및 비행학교 운영 등의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밝혔다.

 

서울시내 한 대형 백화점, 한 층이 노스페이스, 케이투(K2), 코오롱스포츠, 블랙야크, 컬럼비아 등 유명 아웃도어 매장으로 꽉 찼다. 2000년대 들어 아웃도어 의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백화점 의류코너도 그에 맞춰 변했다. 국내 아웃도어 시장은 7조원 규모가 넘는다. 시련이 없지 않았지만, 노스페이스는 꾸준히 1위를 지켜왔다. 순위에 걸맞게 노스페이스의 매장이 백화점 아웃도어 가운데 가장 넓어 보였다.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 입점한 노스페이스 매장 모습. 노스페이스는 우리나라에서 수년째 아웃도어 브랜드 가운데 매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2011년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가 10대 청소년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비싼 가격 때문에 학부모들의 허리가 휘어진다는 뜻에서 ‘등골브레이커’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이후 소비자단체들은 해마다 노스페이스를 비롯한 아웃도어 의류의 가격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외국보다 국내 판매가격이 비싸다거나, 원가 대비 마케팅 비용이 과도해 가격거품이 심하다거나, 성능은 비슷한데 가격은 천차만별이라는 내용 등이었다.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100달러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을 받고, 임금인상을 요구하다 목숨을 잃는 현실은 관심 밖이다. 유신재 기자

“어서 오세요.” 매장에 들어서자 점장이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점장(샵마스터)은 영원무역 자회사인 골드윈코리아(현 영원아웃도어)에 입사했다가 몇년 전 개인사업자로 전환했다. 영원무역뿐 아니라 국내 대부분의 의류 브랜드는 샵마스터라고 불리는 개인사업자들이 판매를 맡는다. ‘외주화’다. 점장 밑의 점원은 보통 오래 근무한 순서대로 첫째, 둘째로 통한다. 점장은 점원의 급여를 말하길 꺼렸다. 시급을 7000원가량 준다고 눙치면서 입을 닫았다. 매장을 관리하는 백화점 쪽에서는 점원의 급여에 신경쓰지 않는다. 점원은 근로계약서조차 없이 구두계약으로 고용되는 경우도 많다. 백화점 한 관리자는 “오래 근무한 점원이라야 200만원가량 받는다”고 귀띔했다. 대개 최저임금(시간당 5210원)을 겨우 넘는 수준이다.

 

‘첫째’ 점원이 다가와서 손님의 시선이 잠시 머무는 곳에 놓인 제품을 능수능란하게 설명했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중국 등지에서 생산한 재킷과 신발, 배낭, 모자 등이 화려하게 전시돼 있는데, 재킷은 보통 수십만원대다. 가장 비싼 다운점퍼는 60만원을 웃돈다.

 

우리나라 고객들은 원산지에 민감하다. 점장은 “원산지가 한국이라고 하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방글라데시나 중국, 베트남이라고 하면 ‘품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못미더워한다”고 말했다. 소비자는 제품의 품질 때문에 원산지를 물을 뿐, 브랜드에 숨겨진 얘기를 묻지는 않는다.

 

"노동자대표들 테러당하지 않았냐” <한겨레> 취재에…영원무역 “상상도 못할 일, 사실 아니다”

이 기사는 <한겨레> 8월25일치부터 29일치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보도된 기획기사를 디지털 스토리로 재편집한 것이다.

영원무역은 2010년 12월, 그리고 올해 1월 방글라데시 치타공에 있는 공장에서 발생한 폭력 사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건의 원인과 ‘피해자’에 대해선 <한겨레>의 취재 결과와는 다른 주장을 펴왔다.

영원무역은 2010년 12월11일 와이에스엘(YSL) 공장에서 ‘노동자 대표들이 회사 관리자들한테 불려 가 테러를 당하지 않았느냐’는 <한겨레>의 질의에 “상상도 할 수 없고, 사실도 아니다”라고 지난 4월 답변해왔다. 또 “그(최저임금 인상) 집행 과정에서 신원 미상의 사람들이 (영원그룹) 7개의 공장을 거의 동시에 습격하면서 (사건이) 발생되었고, 그 가운데 길가에 있던 와이에스엘 공장에 그들이 진입했다”고 덧붙였다. 외부 세력에 의한 사건으로, 테러를 당해 숨지거나 다친 노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회사가 그 사건으로 2만2000달러(약 2300만원)에 이르는 피해를 보고, 회사 쪽 관리자가 폭행을 당해 심하게 다쳤다고 밝혔다.

다음날 와이에스엘 공장이 자리잡은 치타공 수출가공공단(CEPZ) 앞 노동자 시위의 원인에 대해서도 회사와는 관계가 없다고 했다. 영원무역은 “시위가 영원 소속 공장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했거나 영원 공장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최저임금 시행 과정에서 근로자들의 불만족을 야기한 외부 세력의 개입에 따른 결과”라고 밝혔다.

영원무역은 지난 1월 파빈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서도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과정에서 총급여가 대폭 인상되었지만 일부 근로자들이 임금체계를 오해했다”고 밝혔다. 또 “다수의 이웃마을 불량배들이 공장에 침입해 내부 집기를 부수고 수출 대기 중인 신발 7000켤레를 약탈해 갔다”고 덧붙였다.

<한겨레>는 영원무역의 반론을 반영한 위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8월25일치 신문에 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무역은 10월14일 <한겨레>가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이후 양쪽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와 증거를 언론중재위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10월29일 언론중재위가 열렸지만, 조정은 결렬됐다. 영원무역은 <한겨레>가 사실을 잘못 보도했다는 내용의 정정보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현직 판사 등이 포함된 중재위원들은 정정보도를 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겨레> 또한 정정보도를 수용하지 않았다.

영원무역은 11월21일 정정보도와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12월8일 <한겨레>에 소장이 전달됐다. 영원무역은 지난 8월26일 이후 세 차례에 걸쳐 <한겨레> 기사의 허위성을 주장하는 글을 자신들의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놓고 있다. <한겨레>는 이들의 글이 합리적인 반론과 반박을 넘어서 <한겨레>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판단 아래, 공식적으로 이를 시정하라는 공문을 보낸 상태다.

취재 류이근 유신재 사진 이정아 김명진 영상편집 정주용 기획 및 제작 조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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