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단 제진역, 확성기 공포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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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11-09 18:41
수정 2021-11-1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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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아트&피스 플랫폼’ 프로젝트 현장

제진역 플랫폼 철로 건너편에 자리한 열차 정비창은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 조형물을 떠올리게 하는 외관으로 단연 눈길을 끌고 있다.

생전 미국 텍사스 황야에 각진 콘크리트 건물군과 금속상자들을 늘어놓고 자기만의 미니멀리즘 세계를 이룩했던 미국 모더니즘 미술의 대가 도널드 저드(1928~1994). 그가 환생한 것인가? 지난 8일 오후 대한민국 최북단 역인 강원도 고성 제진역에서 저드의 예술혼이 남북 분단의 현장에 찾아온 듯한 시각의 연금술이 펼쳐졌다.

철로 건너편에 억새풀들을 거느린 채 서 있는 열차 정비창 창고 건물은 저드의 미니멀 조형물을 떠올리게 하는 외관으로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길쭉한 옆벽에 사각형 창이 일렬로 뚫렸고, 앞뒤로 환하게 트인 입구와 출구를 지닌 이 창고는 원래 운행을 마친 열차가 들어가 잠자는 공간. 하지만 남북관계 경색으로 오래전부터 열차가 다니지 않아 텅텅 비었다. 처연하게 저물어가는 백두대간의 석양과 하늘거리는 억새들의 풍경과 어울린 정비창은 저드의 각진 설치공간 이상으로, 숭고하며 비장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금강산 가는 길목이자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 바로 남쪽의 제진역에 펼쳐진 ‘2021 디엠제트(DMZ) 아트 & 피스 플랫폼’ 프로젝트 현장에선 제진역 실내에 설치된 국내 작가 10명의 작품들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실외 건축과 분단 풍경이 강렬한 볼거리를 안겨주었다.

최재은 작가의 설치작품 <자연국가>.

실내 현관에서 관객을 맞는 최재은 작가의 설치작품 <자연국가>는 불교의 전륜성왕으로 불리는 고대 인도왕 아쇼카가 백성들에게 5종류의 나무를 심고 보살피도록 권유한 고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갖가지 나무들이 가득 찬 ‘자연국가’를 세우겠다는 건립 구상을 담은 계획안과, 자신이 생태학자팀과 함께 만든 ‘디엠제트 생태 현황 지적도’를 휴전선 모양으로 짠 나무진열대에 넣어 전시하는 얼개다. 진열대 옆에는 고성 비무장지대 인근의 돌들이 놓여 있고, 현장에서 채집한 자연의 소리도 10개의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조각 작업을 해온 고경호 작가가 제진역 안 빈 사무실에 내놓은 철조망+확성기 설치작품 <리플렉션-빅 보이스>.

조각 작업을 해온 고경호 작가가 제진역 안 빈 사무실에 내놓은 철조망+확성기 설치작품 <리플렉션―빅 보이스>. ‘반영―큰 목소리’란 뜻을 지닌 제목처럼 과거 군인 부친을 따라 디엠제트 지대 근방에 살던 시절 확성기 소리에 얽힌 공포와 불안감의 기억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 작가는 어린 시절 북한의 침략 위험 등을 담은 경보와 경고를 전하던 확성기를 비무장지대 근방 자연음을 들려주는 평화의 사운드 매체로 변화시켰다.

제진역 출입경 심사대 위에 나온 정소영 작가의 설치작품 <돌아온 길>.

제진역 출입경 심사대 위에 나온 정소영 작가의 설치작품 <돌아온 길>도 잔상이 남는 주목작이다. 관객들은 동해안에서 모은 해변가 모래와 부표, 조개껍질 등 부유물들을 검색대 위에 흩뜨려 놓은 모습을 본 뒤 곧장 이어지는 회전문 구조물을 통해 다시 검색대의 부유물로 돌아가 감상을 거듭하게 된다.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모래와 부표 등이 닫힌 경계 지점인 역사의 공간과 대조를 이루며 분단 현실을 환기시킨다.

제진역의 빈 사무실 공간에 한석경 작가는 이제는 고인이 된 실향민 출신 친할아버지의 생전 쓰던 방을 재현했다.

제진역의 빈 사무실 공간에 한석경 작가는 이제는 고인이 된 실향민 출신 친할아버지의 생전 쓰던 방을 재현했다. 분단과 이산가족과 관련한 영상과 신문 등 각종 자료를 평생 수집하며 향수를 달랬던 고인의 자취가 뭉클하게 눈에 밟힌다. 방 한쪽 의자에 할아버지가 생전 중국 중개인을 통해 입수한 북한의 흙 주머니들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란 글자가 적혀 있다.

역대 최초로 디엠제트 구역 안에 있는 파주 옛 출입경사무소(유니마루)와 고성군 제진역에 전용 전시공간을 만들어 국내외 주요 작가들의 설치, 미디어아트, 조형물 작업을 내보인 이번 전시는 수년 동안 비무장지대를 직접 체험하고 성찰한 작업들을 대거 내보였다. 전시감독을 맡은 정연심 홍익대 교수는 “인간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생태 자연을 주된 내용으로 체화한 작품들을 통해 남북 긴장을 풀어가는 고리로서 예술의 역할을 부각하려 했다”고 말했다. 15일까지.

제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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