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우주’ 132억 낙찰자에 얽힌 미스터리

등록 2022-08-19 08:00
수정 2022-08-19 18:24
텍스트 크기 조정
글자크기

[작품의 운명]
김환기의 푸른 점화 두폭짜리 대작
2019년 크리스티홍콩 경매서
10여분간 긴 경합끝 거액 낙점

외국인 혹은 재미동포라고만 알려져
재벌그룹 손자라는 소문 돌기도
지난 6월 김웅기 회장으로 밝혀져
소장자 베일에 가린 이유 수수께끼

2020년 4월 갤러리현대 개관 50주년 특별전에 나온 김환기의 대작 <우주>. 노형석 기자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관람석에서 경매를 지켜보던 누군가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만큼 세기의 경매였다. 지켜보는 기자들도 미술 시장 관계자들도 침을 꿀꺽 삼키며 연단을 주시했다.

때는 2019년 11월23일 저녁.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시위가 한창이던 홍콩섬 완차이 해안의 홍콩컨벤션센터 3층 그랜드홀에서 한국 현대미술 시장의 역사에 남을 긴장감 넘치는 경매 드라마가 10여분간 펼쳐졌다.

세계 굴지의 경매사 크리스티 홍콩의 ‘20세기와 동시대 미술 경매’에 주요 출품작으로 소개되면서 17번째 거래 작품으로 등장한 김환기의 1971년 작 푸른 점화 대작 <우주>(원제: 05-IV-71 #200)를 놓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응찰자들끼리 불꽃 튀는 가격 경합이 시작됐다.

“포티 밀리언 달러!”

영국인 경매사는 시작가로 4000만홍콩달러(한화 약 60억원)를 불렀다. 응찰자들은 휙휙 오른 가격을 불렀고 불과 5분 만에 8000만달러를 돌파했다. 한국 미술 시장에서 마의 벽으로 여겨졌던 작품 가격 100억원을 순식간에 넘겼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8100만, 8200만, 8400만…, 어느 홍콩 한국 동포의 전화를 받고 대신 응찰한 크리스티 한국의 이학준 대표는 급기야 8500만달러까지 불렀다. 한화로 130억원대가 다가왔다. 미지의 응찰자를 대리한 프랜시스 벨린 크리스티 아시아·태평양 총괄 사장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좌중을 굽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에이티에이트!” 8800만달러(132억원)였다. 경내가 술렁거렸다. 경매사가 외쳤다. “9000만달러 도전하십니까?”

2019년 11월23일 저녁 열린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의 대작 <우주>를 놓고 경매사가 값을 흥정하고 있다. 130억원 넘는 값을 호가하면서 막바지 가격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다. 노형석 기자
전화기를 쥔 이학준 대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경매사가 다시 외쳤다. “8800만달러군요. 프랜시스, 당신 손님에게 팔렸어요.” 박수가 터졌다. 한국 미술품 최초로 경매가 100억원대를 넘어 132억원, 수수료를 합하면 150억원대 최고액 작품이 탄생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경매 경합시간이 1~2분에 불과한 데 비해 <우주> 경매 경합에 걸린 시간은 10분을 훌쩍 넘었다. 시작가 60억원에서 70억원의 거액을 휙휙 호가로 올리며 관객들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한국 추상회화의 선각자였던 김환기는 말년인 1970년대 초반 미국 뉴욕 작업실에서 푸른빛의 추상점화들만 그렸다. 삼라만상의 우주, 고향인 전라도 신안 섬들의 바다와 밤하늘을 그리면서 그만의 조형 감각으로 표현했다. 그림을 채운 점과 선은 조선 백자항아리, 산, 달의 정경을 반추상 화면에 담은 1950년대 장년기 작품들의 요소가 더욱 농축되어 우러난 것들이었다. <우주>는 김환기가 뉴욕 시절 작업한 추상점화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대작이며, 유일한 두폭짜리 그림이다. 1950년대 부산 피난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지인이자 후원자였던 재미동포 의사 김마태씨와 부인 전재금씨가 고인한테서 사들여 40년 이상 소장하다 국내 화랑시장에 80억~90억원대의 가격대로 냈으나 거래가 되지 않아 크리스티의 권유로 경매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우주>는 다채롭고 깊은 푸른빛 색조와 점들을 자유롭게 화면에 부리며 아득한 시각적인 울림을 주는 명품으로, 2000년대 이후 작가 최고의 대표작으로 재평가됐다.

1972년 김환기가 자신의 대작 <우주>가 내걸린 지인 김마태 박사의 뉴욕 집 거실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당시엔 그림 두 폭을 수직으로 세우지 않고 모로 눕혀 맞붙여놓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낙찰자가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누구인지가 희대의 의문으로 남았다. 경매사는 소장자의 신분 보호를 내세워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 외엔 일체의 정보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매 다음날 미술 담당 기자들에게 어느 재벌그룹 손자가 투자해 샀다는 의문의 내용을 담은 이메일이 전달되기도 했다.

2020년 4~6월 갤러리현대 개관 50주년전에 <우주>를 대여해 전시했을 때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소장자가 재미동포라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6월 뜻밖에도 소유주가 패션·의류 재벌인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으로 드러났다. 김 회장이 서울 강남에 새 갤러리를 마련하면서 자신이 바로 당시 경매에서 거액을 들여 작품을 산 당사자라고 보도자료를 내어 털어놓은 것이다.

1971년 미국 뉴욕 작업실의 그림 앞에 선 김환기. <한겨레> 자료사진
도 대표는 이와 관련해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당시 자신이 김 회장과 경매장 현장 사이에서 전화를 붙잡고 흥정해 낙찰을 성사시켰다고 털어놨다. 그는 “경매 막판에 8000만달러 선에서 서로 100만씩 호가해 상대방 응찰자가 8500만달러까지 불렀을 때 제가 ‘두세배 더 세게 불러서 맞받아치는 것으로 승부를 내자’고 김 회장을 설득했다”고 했다. “김 회장이 결단해서 제가 300만을 더 붙인 8800만달러를 과감하게 전화로 부른 것이 적중해 경합에서 이긴 것”이란 회고였다. 2020년 전시 때 재미동포가 소장자라고 자신이 언론에 밝혔던 건 당시 낙찰자 신원을 공개할 수 없는 민감한 상황이라 그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도 대표의 해명은 무슨 의미일까? 그럼 낙찰자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크리스티 관계자의 말은 빈말이었을까? 낙찰 다음날 언론에 전달된 불상의 메일은 또 무엇일까? <우주>는 앞으로도 소장자를 둘러싼 수수께끼 같은 의문들을 달고 다닐 것으로 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댓글 0

on·off 버튼을 눌러서 댓글보기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1/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