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뎀뎀뎀…뀌뀌뀌…냠냠냠!”
바람 부는 섬에서 두 사람의 여성이 관능적인 소리를 내며 나무와 바위 사이를 돌아다닌다. 재불 작가 이슬기씨가 최근 만든 13분짜리 사운드 영상물 <여인의 섬>의 한 장면이다. 작가는 프랑스 브르타뉴 북쪽 해안 지역에 있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닮은 ‘여인의 섬’에서 남녀의 성적 결합을 암시하는 외설스러운 전승 노래를 부르는 여성들의 구음을 자연과 함께 담아 보여준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그림·영상·사운드아트 작업을 함께 해온 이 작가는 이런 독특한 사운드 영상을 오는 22일부터 <티비에스>(TBS) 라디오에서 들려준다. 홍대 앞 대안공간 루프가 의욕적으로 기획한 공공예술 프로젝트 전시 ‘레퓨지아’의 일부다.

루프의 ‘레퓨지아’에는 2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한국·독일·프랑스·미국 등 다국적 여성 작가가 참여한다.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민감하게 포착한 소리 예술을 루프 공간 전시와 별개로 티비에스 라디오 프로그램(월~금 ‘김규리의 퐁당퐁당’)을 통해 3월5일까지 방송 사이사이 틀어주는 전례 없는 프로젝트다.
‘레퓨지아’는 집단생물학 용어로 멸종위기 동식물이 마지막으로 서식하는 공간을 말한다. ‘레퓨지아’전은 지금 우리가 겪는 코로나 사태가 자본주의 문명 체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묻는다. 기존 문명 체계를 넘어서는, ‘자본 너머—여성성—공생과 지속의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문명 체계를 예술가의 사운드 작업으로 상상하는 시도다. 특히 아흔을 바라보는 노장 작가인 프랑스의 엘리안 라디그를 비롯해 미국의 타니아 레온, 독일의 크리스티나 쿠비슈의 작업은 사운드아트 역사에서 기념비적 작업으로 꼽힌다. 산모 뱃속에서의 태아의 박동음 등을 포착한 라디그의 사운드아트는 신비하고 깊은 울림이 있다. 전자기 신호가 아날로그 기계음에서 도시 현장의 실제음으로 변환되는 크리스티나 쿠비슈의 <테슬라의 꿈>, 서도민요 ‘사설난봉가’ 리듬에 맞춰 ‘이게 맞나’라는 가사로 현 코로나 시대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민예은 작가의 작업이 귀를 끌어당긴다. 양지윤 큐레이터는 “지금 우리의 듣기 문화는 대중음악이 사실상 모든 것을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운드아트가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속가능한 문명에 대한 여성 작가들의 감수성을 반영한 소리 예술로 새로운 듣기 문화를 만드는 데 자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루프의 전시는 3월14일까지 이어지며, 유튜브 ‘레퓨지아’ 채널을 통해서 1시간40분 분량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레퓨지아’전에서 보듯 새봄을 맞는 올해 상반기 미술판의 핵심은 여성 작가들의 다채로운 프로젝트와 신작이다. 특히 다양한 연령대의 국내외 여성 작가의 약진이 돋보인다.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는 83살 노장 윤석남 작가는 17일 학고재 갤러리에서 시작하는 ‘싸우는 여자들의 초상’(4월3일까지)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과 대형 설치작업을 통해 또 다른 역사인물 초상화에 도전한다. 민족해방운동사에서 빛나는 다양한 계층의 여성 군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1920년대 노동쟁의를 주도하면서 평양 을밀대 기와지붕에 올라가 여성 노동자의 임금 지급과 권익 쟁취를 요구한 강주룡의 모습, 국내 최초의 여성 파일럿인 권기옥이 비행복을 입고 앞을 주시하는 모습, 교탁 위에 왼손을 길게 뻗은 자태로 항일 의지를 내비치는 김마리아의 모습 등이다. 이는 작가가 학자들과 그들의 생애사에 관해 교감한 뒤 얼굴과 몸짓 등을 상상해 만들었다. 작가는 “옛적 초상화 화본을 봤는데 여성의 초상은 너무 적어 답답했다. 여기에 더해 애달픈 사연을 안은 채 묻혀버린 여성 독립운동가가 너무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고 했다.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김민정(59) 작가의 개인전 ‘타임리스’(3월28일까지)는 서구에서 동양적 서정이 깃든 추상회화로 주목받는 그가 4년 만에 여는 국내 전시다. 한지의 아름다운 빛깔과 색의 번짐을 태우기와 붙이기의 반복을 통해 표출한 <타임리스> <커플> 등의 연작이 새롭게 나왔다. 20차례 이상 태우기와 붙이기를 되풀이하는 강도 높은 반복 작업과 더욱 다채로운 색조 구성을 취하는 방식으로 비움과 채움, 음양의 동양적 이미지를 깊이감 있게 펼쳐내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