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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마지막 성화 봉송 주자

등록 2021-07-25 17:51
수정 2021-07-2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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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근

사회학자

문제적 명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민족의 제전>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담은 최초의 올림픽 기록영화다. 손기정, 남승룡의 마라톤 역주와 시상식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시상대에서 고개를 푹 숙인 두 선수 뒤로 일장기가 올라가는 모습이 아릿하다. 영화 초반에는 그리스에서의 성화 채화, 장거리 봉송, 하이라이트인 성화 점화가 담겼다. 베를린 때부터 성화 봉송이 시작됐다.

성화를 점화할 마지막 주자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의 격전장 올림픽에서 초미의 관심사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원폭이 터진 날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원폭의 아이’가 최종 주자가 됐다. 가해자 일본이 희생자로 바뀌는 상징정치였다. 이번 올림픽의 최종 주자도 관심을 모았다. “나가시마씨가 성화를 운반할 때는 눈물이 나왔다. 오사카 나오미가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야후재팬에 열린 “도쿄올림픽 개회식, 당신의 만족도는 몇 점?”이라는 게시판에 달린 댓글 중 하나다. 투표는 10점 만점과 0점에 몰려 있다. 부정적 댓글이 많다. 최종 주자 오사카 나오미를 납득할 수 없다는 의견들이 두드러진다.

나가시마 시게오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4번 타자다.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함께 1965년부터 73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일본시리즈 9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고도성장기이자 국민스포츠 프로야구의 황금기였다. 선진국 진입의 자부심이 넘치던 시절이다. 그 좋던 시절을 상징하는 나가시마가 이제 노인이 되어 부축을 받으며 성화를 나른다. 중장년 이상 일본인들의 눈시울이 붉어질 법도 하다.

반면 오사카 나오미는 23살의 젊은 여성 테니스 선수다. 그랜드슬램 대회를 네번이나 제패한 월드스타이니 최종 주자 자격이 충분할 텐데,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그녀는 아이티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순혈주의에 따른 반감도 크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네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국에서 컸다. 22살에 일본 국적을 선택했지만, 일본어는 잘 못 하고 집도 미국이다. 이런 의견도 있다. “멋진 그녀를 만든 건 미국이지 일본이 아니다. 가식적인 다양성은 필요 없다.” 역시 흑인 혼혈이지만 일본에서 자라고 미국프로농구(NBA)에서 활약하는 농구선수 하치무라 루이였다면 환영했을 거란 의견도 있다. 순혈주의 때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함께 부대낀 역사가 없는 인물을 그저 유명하다는 이유로 다양성의 상징으로 내세웠다는 비판이다. 일리가 있다.

한데 사태는 좀 더 복잡하다. 오사카 나오미는 사회문제에 뚜렷한 소신을 밝혀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흑인 차별 사건들을 비판해왔고, 항의 표시로 경기를 보이콧한 적도 있다. 모리 요시로 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여자가 많으면 이사회가 늦어진다”고 발언하자 사임을 촉구했다. 정치적 발언을 한다는 비판에 물러서지 않고 맞서왔다. 언론 인터뷰 거부나 수영복 화보 촬영 등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튀는 게 금기시되는 일본에서 드문 유형이다. 미국에서 성장해서 다를 것도 같다. 하긴 다르지 않다면 다양성은 무엇일까? “외모는 달라도 마음은 역시 일본인”이라는 식이라면 그게 다양성일까?

작년 말, 일본을 떠들썩하게 한 나이키 광고가 있다. 이지메 당하는 일본인, 차별받는 흑인 혼혈, 재일조선인, 세 명의 소녀가 주인공이다. 흑인 소녀가 오사카 나오미의 유튜브를 보는데 댓글이 따진다. 그녀는 미국인? 일본인? 차별을 의식하며 살던 재일 소녀는 일본학교로 전학 가서 일본 이름표를 단다. 소녀들은 달리고, 축구로 슬픔을 이겨낸다. 결국 소녀들은 스포츠를 통해 친구가 된다. 재일 소녀는 다시 한국 이름표를 단다. 일본 사회의 차별을 정면 비판해서 큰 논란을 부른 광고에 오사카가 출연했던 것이다.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한국은 참가국 중 가장 많은 18명의 귀화선수를 출전시켰다. 개막식에서는 다문화 가정 아이들로 꾸려진 레인보우합창단이 애국가를 불렀다. 노래는 감동적이었고 선수들은 열심히 뛰었다. 물론 다문화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오사카 나오미에게서 보듯 다양성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스포츠 민족주의의 전장 올림픽이 다양성을 내세우게 된 시대의 역설이기도 하다. 하긴 공존을 외치는 나이키는 동남아 공장들에서의 아동노동 착취로 비판받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 성급한 결론보다는 곱씹자.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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