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전 칼럼] ‘최빈도 죽음’, 즉 우리가 맞이할 죽음

등록 2022-05-17 18:06
수정 2022-05-18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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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많아도 고독한 기간이 연장될 뿐, 그 끝은 비슷하다. 권력도 소용없다. 많은 이들이 스콧 니어링처럼 100살쯤 되어 자기 집, 아내 곁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꿈꾸지만, 노화는 제일 먼저 그런 인지기능과 의지를 빼앗는다. 잊힌 채 누워 있는 시간을 빼면 과연 한국 사회의 평균 수명이 늘었다 할 수 있을까?

게티이미지뱅크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최근 호스피스 전문 의사인 박중철씨가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 속에는 ‘최빈도 죽음’, 즉 우리가 맞이할 가능성이 가장 큰 죽음의 모습이 있다.

“60대 후반부터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감소되면서, 고혈압, 당뇨, 뇌졸중, 폐렴, 낙상으로 인한 골절로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한다. 자녀들은 육아나 생계 문제로 간병이 어렵다. 결국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한다. 열악한 임금·노동조건 아래서 적은 간병인력으로 운영되는 시설에서 한사람 한사람 세심한 인격적 돌봄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일당 10만~15만원인 사설 간병인을 몇년간 둘 수도 없다. 누워 있는 모든 노인 환자들의 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이 꿈을 이루는 이는 거의 없다. 간혹 성공해도 곧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와야 한다. 폐렴, 요로감염, 뇌경색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코에는 인공급식관이 끼워진다. 몸에는 독한 항생제 내성균이 자라고 격리 차원에서 면회와 접촉이 제한된다. 몇차례 응급상황이 벌어지고, 처치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2020년 전체 사망자의 75.6%가 요양병원을 포함한 의료기관에서 사망했다. 물론 이런 죽음을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최빈도 죽음은 그나마 병원비를 낼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 시간에도 며칠째 대소변을 처리하지 못한 채 골방에 혼자 누워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다. 간병과 생활비 벌기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경훈이는 자퇴하고, 성희는 애인과 헤어졌다. 간병은 가장 비민주적인 권력공간이다. 약자가 가장 힘든 일을 맡는다.

돈이 많아도 고독한 기간이 연장될 뿐, 그 끝은 비슷하다. 권력도 소용없다. 사람들이 찾는 건 정승이 아니라 정승 집 개가 죽었을 때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스콧 니어링처럼 100살쯤 되어 자기 집, 아내 곁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꿈꾸지만, 노화는 제일 먼저 그런 인지기능과 의지를 빼앗는다. 죽기 위해 병원에서 인공급식관을 빼는 것도 현행법상 불법이다. 영국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말처럼 우리가 맞이할 죽음은 ‘때 이른 죽음’이기도 하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잊힌 채 누워 있는 시간을 빼면 과연 한국 사회의 평균 수명이 늘었다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맞이하게 될 최빈도 죽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바라는 ‘좋은 죽음’, 즉 고통이 없고,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며,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잘 준비된 죽음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결국 하루 종일 오직 성장과 돈만이 해결책이라는 슬로건 아래 생존의 전쟁터로 내몰려 가족의 죽음 과정에서조차 연민의 시간을 나누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그 원인이다. ‘건강하게 살아 있는 자만이 생산적이고 고로 가치가 있다’는 천박한 문명 말이다. 죽음을 감당할 준비가 안 돼 있으니 죽음을 부정하는 심리적 방어기전이 작동하고, 정작 죽음이 닥치면 자신의 죽음마저 의료전문가에게 맡긴다. 의료는 갈수록 영리화되고 비싸져 그 돈을 벌기 위해 가족들은 다시 연장근무를 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돌고 있다.

우리의 죽음이 쓸쓸하고 볼품없어지는 사이 이미 전체 인구 중 32%가 1인 가구로, 국가가 간병 책임을 떠넘겼던 가족이 사라지고 있다.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부양할 인구는 2020년 38.7명에서 2038년에 70명, 2056년에는 100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낙인과 저임금에 시달리며 간병 인력의 60~80%를 지탱해주었던 중국동포들도 이제 늙어가고 있다.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가정·지역사회·의료기관·복지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계된 보편적, 포괄적 돌봄체계의 구축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체계의 운영 중심에 죽음에 대한 격리와 배제가 아니라 연민이 자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민은 공공성의 다른 이름이다. 이 연민 공동체를 제일 먼저 파괴하는 것은 빈부 격차, 약육강식과 각개약진의 풍조, 영리화 정책 등이다. 사회서비스 영역 규제 완화와 영리화를 표방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이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이유다.

잠시 시간을 내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병상에 기저귀를 차고 몇달째 누워 있는 당신을 떠올려보시라.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깨어난 새벽, 당신은, 아니 우리는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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