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랑 나랑 겨리 맺자

아기의 숨겨진 머리 냄새엔 생존 전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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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1-11-25 10:00
수정 2021-11-25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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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무취 헥사데카날에 노출된 남·여 반응
남성은 차분해지고, 여성은 공격성 높아져

아기의 두피에서 방출되는 무색무취한 화학물질은 아빠와 엄마에게 다른 반응을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픽사베이

언어가 없는 동물 세계에서 같은 종의 동물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가 페로몬(pheromone)이라는 화학물질이다. 경보나 구애 등의 신호를 전달하기 위해 몸 밖으로 분비하는 냄새 물질이 바로 페로몬이다. 누에나방, 벌 등 주로 곤충들이 교미의 수단으로 페로몬을 분비하고, 일부 척추동물과 식물에서도 페로몬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에게도 페로몬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겨드랑이 체취 등이 인간 페로몬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규명된 것은 없다. 이번에 인간 페로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스라엘 와이즈만과학연구소는 아기들의 두피에서 배출되는 헥사데카날(HEX)이라는 이름의 무색무취한 휘발성 화학물질이 여성에겐 공격성을 자극하고, 남성에겐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내용의 연구 논문을 과학저널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최근 발표했다. 헥사데카날은 신진대사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이지만, 어떤 음식 섭취를 통해 이 물질이 만들어지는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연구를 이끈 노암 소벨 박사(신경과학)는 “이 화학물질이 페로몬이라고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행동, 특히 공격적 행동에 일정하게 영향을 주는 인체 분비물이라고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참가자들은 짜증의 정도에 따라 폭발음 강도를 선택해 버튼을 눌렀다. 헥사데카날에 노출된 남성은 상대적으로 더 작은 폭발음을, 여성은 더 큰 폭발음을 선택했다. 와이즈만과학연구소 제공

두피에서 나오는 화학물질 중 가장 많아

연구진에 따르면 헥사데카날은 피부나 침, 대변을 통해 몸밖으로 배출된다. 특히 아기들의 경우엔 주로 두피에서 이 물질이 나온다. 아기 머리에서 방출되는 분자 물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헥사데카날이다.

2015년 독일 호헨하임대 연구진은 헥사데카날에 노출된 쥐들한테서 진정 효과를 확인해 ‘유럽신경과학저널’에 발표했다. 와이즈만연구소는 이 연구를 기반으로 헥사데카날이 사람한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다.

연구진은 우선 21~34살의 실험 참가자 127명(남성 67, 여성 60)에게 강한 분노를 유발하도록 특별히 고안한 컴퓨터 게임을 하도록 했다. 상대와 협상을 통해 가상화폐를 나누는 최후통첩 게임이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참가자의 절반은 코 바로 밑에 헥사데카날과 섞은 정향유(클로브 오일) 천조각을 부착했고, 나머지 절반은 이 물질을 섞지 않은 천조각을 부착했다.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과 게임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게임의 상대는 컴퓨터였다. 컴퓨터는 참가자가 상대방에게 돈을 나눠주는 금액을 전체의 90% 미만으로 제안하면 이를 거부하도록 설정돼 있었다. 거부당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참가자들의 감정은 격해진다.

실험 중에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뇌를 촬영하는 모습. 와이즈만과학연구소 제공

연구진은 여러 차례 제안을 거부당한 참가자가 폭파 버튼을 눌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버튼에는 격한 감정의 정도를 표현할 수 있도록 이모티콘을 여럿 두어 폭발음 강도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헥사데카날 천조각을 부착한 여성과 남성 간에 다른 반응이 나타났다. 헥사데카날 물질에 노출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19% 더 공격적인 행동을 보였다. 반면 이 물질에 노출된 남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18.5% 덜 공격적이었다.

연구진은 이어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로 뇌를 촬영하면서 헥사데카날에 노출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뇌 활동을 비교했다. 이 실험에서도 헥사데카날은 여성의 공격성을 평균 13% 증가시키고, 남성의 공격성은 평균 20%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헥사데카날은 또 여성의 경우엔 공격성을 조절하는 뇌 영역 간의 신경 소통을 줄이고, 남성의 경우엔 해당 영역 간의 소통을 촉진했다.

헥사데카날에 노출된 후 남성과 여성의 반응이 가장 차이가 났던 뇌 영역(노란색). 와이즈만과학연구소 제공

생존에 유리한 아빠·엄마 행동 유도?

연구진은 이번 연구로 드러난 헥사데카날의 역할은 아기의 생존 전략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추론했다.

연구진의 일원인 에바 미쇼르 박사는 아기가 자신의 뽀송뽀송한 솜털 투성이 머리 냄새를 맡는 성인에게 이 화학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포유동물 세계에서 어미들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성을 이용하는 반면 수컷들은 오히려 새끼를 공격할 가능성이 더 높다. 헥사데카날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엄마의 전투력을 높이고, 자신을 해칠 수도 있는 아빠의 공격성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추론이다. 그것이 진화론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이라고 연구진은 설명한다. 물론 이번 연구는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검증된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 바우트대 야스퍼 드 그루트 교수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에 “냄새에 대한 생리학적 반응이 어떤지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연구”라며 “이번 연구는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영국 옥스퍼드대 트리스트럼 와이어트 교수(생물학)는 “연구진은 헥사데카날이 사람의 행동을 바꿀 만큼 충분히 분비되는지 보여주지 못했다”며 화학물질이 인간의 공격성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려면 좀 더 엄격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이런 종류의 심리 실험은 매력적인 연구이긴 하지만 반복 재연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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