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타지 않는다…잿더미 속 ‘범죄 흔적’ 찾는 호미질

등록 2022-05-12 04:59
수정 2022-05-1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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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찰이다②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화재감식팀

김영을 경위가 지난 6일 영등포구 화재 현장에서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반장님 방금 (송파구) 석촌동에서 불났답니다.”

지난 6일 오후 2시29분께, 서울 구로구의 한 식당에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대 화재감식팀 3명이 늦은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화재 소식이 전달됐다. 이들은 서둘러 식사를 마쳤다. “오늘 일찍 못 들어가겠네요.” 김영을 반장(경위)은 늘 있는 일인 듯 기자에게 말했다. 봉고차에 올라탄 이들은 송파구 석촌동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잿더미’에서 단서를 찾아내는 일

이날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서울경찰청 화재감식팀 사무실에서 김 반장을 처음 만났다. 화재감식팀이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지난 4일 영등포구에서 발생한 화재의 합동 감식 현장으로 나가는 김 반장을 따라갔다.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동행하기로 했는데 일정은 늦은 오후까지 계속됐다.

김 반장이 소속된 화재감식팀은 화재 원인이 명확하거나, 규모가 작은 화재를 제외한 서울 전역의 화재 사건을 모두 담당한다. 서울경찰청 별관 3층에는 이 업무를 담당하는 총 15명의 경찰관이 있다. 작년만 하더라도 화재감식팀 인원은 6명에 불과했지만, “화재감식에 인원이 더 필요하다”는 이연재 과학수사과장(총경)과 김상훈 과수대 대장(경정)의 요청으로 인원이 올해 2배 이상 늘었다. 이 과장은 “화재감식은 과거보다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작년까지 60%대에 머물렀던 화재 원인 규명률은 인원을 확대한 뒤로는 90%까지 올랐다”고 말했다.

김영을 경위가 지난 6일 영등포구 화재 현장에서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오전 10시45분께 과수대 차량 두 대가 합동 감식을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김 반장은 회색의 방진복으로 갈아입고 분진을 막아주는 마스크를 꽉 조였다. 화재감식팀은 인화성 물질의 존재를 확인하는 주사기 모양의 키트와 대형 삽자루, 호미, 빗자루를 챙겼다. 김 반장은 “생각보다 최첨단 도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다 타버린 잿더미에서 몇 시간을 호미질하면서 화재의 원인에 힌트가 될 근거를 찾는 게 우리의 일”이라고 했다. 이들이 무너진 폐허에서 발견한 재료는 실화로 알려졌던 방화 사건의 방화 용의자를 찾아내 법정에 세울 수 있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김 반장은 소방팀과 관내 형사들로부터 관련 정보를 들은 뒤, 아직 탄 냄새가 빠지지 않은 현장으로 들어갔다.

“(불은) 이쪽에서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이 많이 탔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지 않나요.” “목격자의 진술도 중요하지만, 저는 현장에서 발견한 게 더 중요합니다.”

소방조사팀과 화재감식팀은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화인’을 두고 서로의 의견을 나눴다. 화재의 원인을 찾는다는 목적은 두 팀이 서로 같지만, 화재감식팀은 실화나 방화 등 범죄의 수단 여부를 세밀하게 판단한다는 점에서 소방팀과 차이를 보인다. 방화 여부를 판단하려면, 화재의 원인을 확인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발화지점을 가장 먼저 찾아야 한다. 김 반장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불이 났을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지점부터 삭제해가면서 발화지점을 찾아간다. 김 반장은 7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지만, 발화지점을 찾는 일은 늘 어렵다고 했다.

만약 화재감식팀이 화재의 이유를 방화로 판단할 경우, 그 판단은 매우 엄밀해야 한다. 판단이 엄밀하지 않으면 방화혐의를 다투는 법정에서 증거 능력에 대해 변호사 측의 공격을 받을 수 있어서다. 그러나 새까맣게 다 타버린 현장에서 이를 명확하게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 반장은 “단선이 된 곳이 1차 발화점인지, 화재가 발생한 뒤에 2차로 발생한 건지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그래서 모든 화재 원인을 두고 ‘판단된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인 것 같다’, 아니면 ‘추정된다’라는 표현을 쓴다”라고 말했다. “이 ‘추정된다’라는 표현을 적기 위해 화재감식팀은 며칠 밤낮을 연구하고 고민합니다.”

화재감식팀 김영을 경위. 김영을 경위 제공

화인을 찾았을 때 “희열 느껴”

오전 11시께부터 시작된 합동 감식은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화재 원인이 명확하게 딱 떨어지면 마음도 편하고 밥 생각도 나고 하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네요.” 확실하게 매듭짓지 못했다는 생각에 김 반장의 표정도 편치 않았다. 화재감식팀은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증거를 떼어 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 검증을 받을 예정이다. 이렇게 이날의 일정이 마무리되는 듯했지만, 갑작스럽게 송파구 석촌동 상가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현장으로 출동했다.

“3층에서 누가 용접을 했는데, 그 불똥이 옆 상가로 튀면서 불이 났나 봅니다.” 오후 3시16분께 송파구 석촌동 화재현장으로 이동 중에 김 반장은 소방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상황을 전달받았다. 오후 4시쯤 석촌동 화재현장에 도착한 김 반장은 화재 시작점으로 추정되는 상가 건물 3층으로 올라갔다. 화재감식팀은 꼼꼼히 현장 주변에 보이는 흔적들을 수집해 나갔다. 8개의 상가가 불에 탔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화재 원인을 제공했던 용접공도 관내 형사들에게 실화 사실을 진술하면서 화인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번에는 발화 원인이 좀 명확한 편이라, 합동 감식까진 필요 없을 것 같네요.” 김 반장은 이 일을 하면서 원인을 규명했을 때 가장 “희열을 느낀다”라고 했다. 다만 명확해 보이는 화재현장이라도 화재감식팀은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을 쏟는다. 매번 다른 현장으로 출동해야 하므로 한번 방문한 현장을 꼼꼼히 사진으로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화재감식팀은 화재 현장에서 보통 200장이 넘는 사진을 찍는다.

오후 5시40분께 이날 현장 조사도 공식 종료됐다. 김 반장은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농담조로 말했다. “저는 혹시나 불이 날까 봐 연초도 안 태웁니다. 일종의 직업병이죠. 저희 팀은 대부분 전자담배 피웁니다.”

김영을 경위가 지난 6일 송파구 석촌동에서 발생한 화재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지난 6일 송파구 석촌동에서 발생한 화재현장에서 화재감식팀이 현장을 살피고 있다.

사진·글/곽진산 기자 kj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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