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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중사’ 박준기의 돌아온 기억 “나는 자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등록 2015-04-17 20:11
수정 2015-04-19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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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제2군단사령부 정보처에서 근무하던 군인 박준기씨는 1994년 원인 불명의 사고를 겪고 두 다리를 잃는다. 군은 자살 기도라고 판단했지만 박씨는 헌병에게 구타당한 기억을 갖고 있다. 자살 기도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부분에서 군 자료에 결함이 발견됐다. 박준기씨가 지난 1일 전북 군산 자신의 주거지에서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사진 허재현 기자

[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직 중사’ 박준기의 투쟁 (상)

▶ 1년여 전 군복무 중이던 ‘윤 일병’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폭행 사건이 일어나도 장병들끼리 입을 맞추면 사건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숨겨져 있던 또다른 윤 일병들이 있을까요. 전직 군인 박준기씨가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그가 겪은 일을 들여다보면 왜 많은 사람들이 군 수사를 불신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됩니다. ‘박준기 사건’의 취재 내용을 두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제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요.” 사내는 차분하게 물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이곳저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좌절해온 20년이었다. “일단 들어보자”고 기자는 답했다. 그를 만난 건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동의 한 커피숍에서였다. ‘열린 군대를 위한 시민연대’의 박석진 활동가가 사내와 함께했다.

한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다리의 무릎 아래 어색하게 붙어 있는 의족이 눈에 띄었다. 사내는 몸뚱이를 의족에 싣고 커피숍 밖으로 뒤뚱뒤뚱 걸어 나갔다. 그의 이름은 박준기(45). 그는 20여년 전 육군 제2군단 사령부 정보처 선임하사(중사)로 복무 중이었다. 박씨는 억울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그 일로 지금은 두 다리의 무릎 아래가 없다.

군과 실랑이를 벌여온 20여년의 세월. 그는 어떤 일을 겪었을까. “폭행 사건이 자살 사건으로 조작됐어요.” 억울하다며 기자를 찾아오는 사람들 태반이 쓰는 단어가 ‘조작’이다. 심정은 이해가 가는데, 대부분 근거가 미약하다. 그러나 박씨의 의견에는 귀 기울여볼 만한 단서가 여럿 있었다. 취재 과정에서 군 수사의 오류가 발견됐다. 오류가 바로잡힐 기회가 있었지만 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숨죽인 윤 일병’들 혹은 ‘숨 끊긴 윤 일병’들은 말이 없다. 군과 국가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진실은 힘이 없다. 1년 전 윤 일병 사건처럼 양심선언을 하는 자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 외엔 미약한 개인들이 홀로 수사자료를 들고 ‘사실과의 전투’를 벌이는 수밖에 없다. 박준기씨는 어쩌면 ‘20여년 전의 윤 일병’이었을까. 박준기씨의 사례에서 군 수사 체계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했다.

‘10시30분’ 과 ‘7시30분’의 간극

1994년 12월17일 토요일. 박씨는 스물넷이었다. 이날 그는 민간인 동갑내기 친구 김내창(가명)씨와 함께 강원도 춘천 시내에서 술을 마셨다. 저녁(또는 밤)에 박씨는 친구 김씨의 차를 몰았다. 무면허 음주운전이었다. 운전 5분 만에 편도 2차선 오른쪽 철책을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김씨는 전치 8주의 부상을 입었고 박씨는 안전벨트 덕에 얼굴에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아 사고 지점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의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으로 왔다.

직업군인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었지만 여기까지는 벌금형 처벌이 예상되는 교통사고 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씨는 이 병원에 머물던 도중 추가로 상해를 입고 정신까지 잃게 된다. 이 추가 사고 과정이 미스터리다. 미스터리 사건은 한 청년 군인의 인생을 산산조각 낸다.

병원 도착 뒤 박준기씨 행적과 관련해, 군의 수사 결과와 박씨의 기억은 첨예하게 갈린다. 먼저 2군단 헌병(군 사법경찰)의 수사 내용이다. 박씨는 춘천 시내에서 1994년 12월17일 밤 10시30분께 사고를 냈다. 병원으로 친구를 데려온 뒤 박씨는 미상의 시각(18일 0시께 추정)에 병원 10층 성당으로 가 15m 아래로 투신했다. 병원 수위장 홍아무개씨는 박씨를 3층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서 18일 0시30분께 발견했다. 헌병이 도착한 건 그 이후다.

홍씨는 ‘박씨가 발견된 지점이 성당 창문 직하 지점이고 이곳은 잠긴 출입문을 내가 열어주지 않는 이상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고 또한 성당 창문도 열려 있고 방충망도 찢어져 있는 점에 비추어 박씨가 투신해 떨어진 것’이라고 군에 참고인 진술을 했다. 군은 박씨가 교통사고의 책임감 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박씨의 기억은 전혀 다르다. 교통사고 시각은 헌병의 설명보다 세시간이나 앞선 저녁 7시30분께. 병원 도착 시각은 7시50분께였다고 한다. 밤 9시5분께 112로 경찰에 교통사고 신고를 하였고 9시50분께 춘천경찰서 소속 최아무개 경장이 병원에 왔다.

경찰이 헌병 쪽에 연락을 취했고 밤 11시20분께 헌병 손일국(가명) 하사와 김용화(가명) 중사가 병원으로 왔다. 그러나 경찰은 박준기씨에 대한 신병인계 서류를 지참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김용화 중사 등과 논의 끝에 일단 헌병이 박씨를 연행해가기로 했다. 신병인계 서류는 군이 다음날 경찰에 보내주기로 협의했다고 한다.

헌병 김용화 중사는 병원 별관 쪽으로 박씨를 데리고 갔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다 올랐을 즈음 박씨는 “왜 군 차량이 있는 주차장으로 안 가고 반대 방향으로 가느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김 중사는 “범죄자 주제에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왜 대드느냐”며 화를 냈고 발로 박씨의 명치 부위를 찼다고 한다. 박씨는 2.3m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의식은 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수위 홍아무개씨가 뛰어와 무슨 일이냐고 김 중사에게 물었다. 김 중사가 ‘박 중사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고 설명했지만 홍씨는 ‘의사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김 중사가 ‘병원 내에서 벌어진 사고이므로 홍씨 당신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좋은 방법 없겠느냐’고 추궁했다. 박씨는 여기까지 듣고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박씨는 사고 11일 뒤쯤 깨어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교통사고 순간부터 기억을 잃었다. 한림대 성심병원의 박씨 의무기록을 보면, 박씨는 등골뼈·엉덩이뼈 상하지·발관절 골절 및 양쪽 혈흉(흉강 내 혈액이 괸 상태), 후복막(내장기관을 둘러싼 얇은 막의 뒷부분) 출혈, 우측두엽(기억 담당 부위) 손상 등의 진단을 받았다. 중상이었다.

헌병이 1995년 1월20일 작성한 교통사고 등의 관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박씨는 ‘피의자가 병원 3층 옥상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병원 수위가 발견하였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요’라는 수사관의 질문에 “전혀 기억나지 않으나 어머니가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하여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돼 있다.

“군을 믿었어요. 군은 어떤 거를 나쁜 쪽으로 하지 않고 사실만을 말할 거라고요. 저는 비록 사고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틀리게 조사하진 않았을 거라 믿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 박씨는 지난 1일 전북 군산의 두평 남짓한 자신의 작은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박씨는 1996년 가을 다리의 염증이 심해져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고 2011년 오른쪽도 절단했다.

군인 박준기는 다리를 잃었다
자살을 기도했다는 수사 결과
그것을 믿고 20여년을 지냈다
잃었던 기억이 되돌아왔다
헌병한테 구타당하는 기억이…

군 수사 결과에 여러가지 의문
자살기도 당시 목격자가 없다
투신 장소인 병원 창문 폭으론
사람 빠져나올 수 없고 바닥에 피
흥건한데 “옷엔 피 한점 안묻어”

“방충망이 찢겨 있지 않더라”

박씨는 1995년 11월 전역했다. 1996년께부터 사라졌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퍼즐이 완전히 완성된 건 2011년께 두 다리를 모두 절단하면서부터라고 박씨는 설명한다. 뇌 엠아르아이(MRI) 사진 등을 통한 신경외과적 진단은 현재 정상이다. 다만 의료계에서는 박씨 같은 사례가 의학적으로 흔하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박씨는 1999년 국방부에 수사자료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자신의 되돌아오는 기억과 수사기록을 비교해보고 싶었다. 수사자료를 받아들고 한림대 성심병원 수위장 홍씨를 찾았다. 별 소득은 없었다.

“수위(홍씨)가 저를 보더니 ‘어? 살아 있었네’라며 놀라더군요. 그에게 제가 발견된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상한 건, 수위가 그 위치를 매끄럽게 기억하지 못하고 한참을 헤맸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박씨는 자신의 자살 기도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확실한 기억을 추적해보고 싶어 2002년께 모 방송사 프로그램의 의뢰로 최면 시술을 받았다고 한다. “헌병 둘이 쓰러진 저를 끌고 나와 병원 밖에 만세 자세로 눕혀 놓고 어떤 승용차를 가져와 밟고 넘어가더군요.”

최면으로 떠올린 기억은 과학적 입증이 아니다. 박씨도 정확한 재조사를 통해 진실을 알고 싶었다. 얼마 뒤 2군단 사령부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초동 조사에 문제가 없어 재조사할 명분이 없다’고 적힌 통지서만 받았다. “군 복무 시 즐거웠던 기억들만 추억으로 간직하시고, 새로운 삶을 힘차고 재미있게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덧붙어 있었다. 다리를 잃은 박씨는 재미있게 살아갈 수 없었다. 2006년 육군 수사단에 재조사 요청을 다시 했다. 또 기각됐다.

군이 자살 기도로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알면 모든 것을 포기하겠지만 군의 수사자료는 부실했다. 박씨가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린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수위장 홍씨의 추측성 진술서, 추락 현장의 흥건한 혈흔 사진, 10층의 열린 창문 등을 멀찍이 찍은 사진만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군이 사고 당일 찍은 사진도 아니었다. 창문 지문과 바닥의 혈흔이 박씨의 것이 맞는지 분석된 것도 없었다.

군 수사자료에는 ‘박씨가 반개방형 창문(창문 하단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밀어 살짝 열리도록 고안된 창문)을 21㎝ 열고 아래로 떨어졌다’고 쓰여 있지만 그 정도 폭으로 자신의 머리가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박씨는 의문이다. 자신의 당시 가슴둘레는 112㎝ 정도로 매우 큰 편(한국 남성 평균 95㎝, 통계청 2013)이었다고 한다.

“제가 당시에 덩치가 커서 맞는 옷이 별로 없을 정도였어요. 어떻게 그 좁은 폭으로 뛰어내렸다는 걸까요. 제가 자살할 이유가 없어요. 친구를 다치게 한 건 분명 미안한 일이지만 친구의 생명이 위독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전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도 있었고요.” 박씨의 의문은 커져갔다.

박씨의 형 박호준(가명·48)씨도 군 수사 결과가 의문이었다. “군이 공개한 사고 현장 사진을 보면 바닥에 피가 흥건하잖아요. 그런데 군이 (1994년 12월28일) 준기가 입었던 옷을 집에 보내왔는데 옷에 피 한점 묻어 있지 않았어요. 입고 있던 외투는 사라지고 없는데 헌병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했어요.”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제가 (사고 한달 뒤쯤인 1995년 1월 말께) 병원 10층 (투신 장소인) 성당으로 가봤어요. 그런데 방충망이 찢어져 있지 않고 볼록하게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기만 한 거예요. 한달 사이 새로 교체한 건 아니었어요. 한눈에 봐도 방충망에 찌든 때가 상당했거든요. 방충망이 찢겨 있지 않은데 어떻게 뛰어내렸다는 걸까요.”

박준기씨는 이전에 군 장학생으로 한림전문대에서 수학했기에 한림대 성심병원 구조를 잘 알았다. 1993년 8월께 병원이 창틀 구조를 사람이 떨어질 수 없도록 바꿨다고 한다. 군이 재조사 요청을 계속 거부하자 2006년 박준기씨는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를 찾아갔다. 권익위는 박씨의 문제제기에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2007년 12월 권익위는 “수사가 미진했고 군이 재조사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국방부검찰단은 2008년 4월 3장짜리 통보문을 박준기씨에게 보낸다. 내용은 여전히 초동 조사에 문제가 없다는 취지였다. 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헌병 김용화씨(2008년 당시는 전역 상태)에 대한 대면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박준기씨는 2009년 춘천경찰서에 김용화씨 등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김씨 등에 대해 조사하지 않고 불기소 처분을 했다. 경찰의 설명은 김씨가 소재지 불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전역 군인이고 휴대전화도 갖고 있었다.

다만 김씨 대신 헌병 손일국은 경찰의 조사를 받았다. 손씨는 경찰에서 “12월18일 0시10분께 경찰의 교통사고 접수 연락을 받고 출동했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박준기가 투신한 이후였다”고 진술했다. 헌병은 박씨와 대화도 나눌 기회가 없었다는 취지의 답변이다.

어찌된 일인지 박준기씨의 신고를 받고 최초 출동한 경찰이 보관하고 있어야 할 신병인계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경찰은 교통사고 출동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에 박씨를 헌병한테 직접 인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경찰청 ‘교통사고조사 매뉴얼 군인사고 처리 요령’은 “사고 후 헌병대에 이첩, 헌병대 출동 시 교통사고 조사보고서 1부 및 사건 인계인수증을 받아 교통사고 조사 보고서에 첨부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경찰은 ‘(112 신고를 받은) 최아무개 경위가 군 헌병대에 연락한 뒤 (경찰서로) 복귀하였다’는 애매한 설명만 했다.

박준기씨가 추락한 장소를 보여주는 군 수사자료의 사진. 수사기록상으로 박씨는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 10층에서 3층 옥상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진 허재현 기자
지난해에는 김관영 국회의원(전북 군산 지역구)이 박준기씨를 도왔다. 김 의원의 주선으로 군은 박준기씨를 불러 병원 현장 재조사를 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막상 참석해보니 현장 브리핑에 그쳤다고 박씨는 주장했다. 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헌병과의 대질신문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새로운 증언 “그 창문으로는 투신 불가”

박준기씨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고통스러운 삶은 계속된다. 신체 일부가 잘린 사람들은 무딘 칼이 살을 계속 긋는 것과 비슷한 통증을 느끼고 산다고 한다. 박씨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마음속에도 칼질을 하는 듯 아프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박씨가 희망을 다시 붙잡은 건 지난해 ‘윤 일병 사망 사건’이 폭로되면서다. 한 장병이 부대 내 폭행 사건이 은폐되었다고 폭로했다. 박씨는 자신의 사건도 다시 밝혀질 수 있을까 기대를 품었다. 열린 군대를 위한 시민연대라는 단체를 찾았다. <한겨레>는 시민단체와 함께 박씨 사건의 진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기로 했다.

지난 1월 춘천시 교동 한림대학교 춘천성심병원 1층 영선실(시설관리)을 박준기씨와 함께 찾았다. 이곳의 근무자 김아무개(61)씨는 ‘박준기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씨는 이 병원의 개원 때부터 지금까지 창틀 등 여러 시설물 관리를 맡고 있다.

“박씨가 떨어졌다고 하는 10층 성당은 과거에 병실이었어요. (박준기 사고 전) 다른 환자들이 병실 창밖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래서 병실 창문 열리는 폭을 아주 좁게 설정해두었어요. 12㎝ 정도로요. 일반 사무실 창은 20㎝ 정도 열리도록 했고요. 근데 그 사건이 아직도 해결이 안 된 건가요?”

김씨는 박준기씨가 창밖으로 떨어질 수 없는 구조인데 어떻게 떨어졌다는 것인지 의아해했다. 군검찰단이 김씨를 찾아와 조사하고 간 적이 없는지 묻자 “그런 적 없다”고 답했다.

수사기록이 권위를 인정받으려면 오류가 없어야 한다. 객관성을 인정받으려면 피의자에게 유리한 기록이든 불리한 기록이든 모두 담겨야 한다. 박씨의 주장이 허위라면 수사기록에 의해 탄핵될 것이다. <한겨레>는 박준기 사건 수사기록을 검증해보았다. 발견된 수사 내용의 오류는 다음주 이 지면에서 자세히 공개한다. 진성준 국회의원(국방위원회)은 “군이 다시 한번 철저하게 조사해야 할 사건”이라고 말했다.

춘천 군산/글·사진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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