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명품 브랜드가 ‘아트’에 눈독들이는 이유는?

등록 2021-07-30 05:00
수정 2021-07-30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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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로 공간읽기
루이비통·구찌·에르메스…
매장 안 아트 갤러리 운영
소비자 니즈 만족만이 아니라
‘아름다움 추구’ 정체성 드러내

루이비통 메종 서울에서 열렸던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 〈4900가지 색채〉. 임지선 제공

지금은 여행이 쉽지 않지만 하늘길이 자유로워져 이탈리아에 가게 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밀라노 남부 라르고 이사르코에 위치한 프라다 재단 미술관(Fondazione Prada)이다. 프라다 창립자의 손녀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미우차 프라다는 예술 발전에 공헌한다는 목표로 1993년 프라다 재단을 설립하고 꾸준히 컬렉팅해 왔는데, 2015년에는 건축가 렘 콜하스의 설계 아래 브랜드 철학을 담아낼 재단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을 담아낼 어마어마한 공간은 면적 약 1만9000㎡의 아트 콤플렉스 외에도 세 개의 건물이 추가로 이어지는, 복합 단지이다. 이 단지 안에 프라다 제품을 파는 매장은 없다. 오로지 예술만을 위한 곳이다. 과거 많은 브랜드들이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브랜드 가치와 매출을 올리는 등 ‘브랜드 안의 예술’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최근 글로벌 브랜드들의 행보는 좀 다르다. 마치 프라다처럼. 미술과 기업 간의 젠틀한 선 긋기가 느껴진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자로 공간을 만들고 전시를 후원하며 작품을 꾸준히 소장하는 등 예술 그 자체를 지원한다. 제품으로 연결 짓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브랜드 옆 예술이랄까. 그렇다면 왜, 이런 공간을 통해 브랜드 옆 예술을 추구하는 걸까?

에르메스 메종 도산파크의 양혜규 작품 〈솔 르윗 뒤집기〉. 임지선 제공

2019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루이비통 메종 서울이 처음 문을 열었던 때 몇 주는 줄을 서서 들어가곤 했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을 보러 온 사람들과 루이비통 메종의 새로운 컬렉션을 보러 온 사람들이 진을 이뤘지만 나는 오로지 4층의 전시 공간을 보고자 줄을 섰었다.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은 루이비통 메종 서울의 4층에 자리하고 있는 전시 공간으로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의 소장품 중 특별히 선별된 작품만을 전시하고 있다. 2019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대표 조각 작품 8점의 전시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에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채’전을 전시했다. 이번 전시는 정사각형 컬러 패널 196개를 여러 사이즈의 작은 격자판으로 조합한 작업부터 하나의 대형 패널로 완성한 작업까지, 리히터의 선택적 행위로 만들어진 11가지 버전 중 9번째 버전의 다채로운 색상의 스펙트럼을 감상할 수 있었다. 4900가지의 색채로 이루어진 4m 높이의 작품을 통해 작가를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나면 한 층 한 층 내려오면서 만나는 제품들의 모습이 이렇게 낯설고도 신선할 수 없다. 제품을 들여다보고 들춰볼 때와 다른 시각으로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

프랭크 게리가 건축한 루이비통 메종 서울. 임지선 제공

올해 5월 구찌 청담에 이어 새롭게 한남동에 자리 잡은 구찌 가옥은 명품 매장을 강남에서 강북으로 옮겨오는 신선한 시도로 먼저 주목을 받았다.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를 접목한 ‘가옥’ 콘셉트도 흥미로웠지만 몇 개월째 꾸준히 젊은층의 발길을 끄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구찌 가옥의 지상층엔 구찌가, 지하에는 파운드리 서울 갤러리가 있기 때문이다. 6월 개관한 파운드리 서울은 한국에서 전시를 연 적 없는 외국 블루칩 작가와 떠오르는 현대미술가들을 소개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갤러리로 6월부터 베를린 출신 작가 헤닝 슈트라스부르거와 강혁의 전시를 진행했다. 1층으로 들어가면 매장이 시작되고, 지하로 내려가면 넓고 깊은 전시 공간이 펼쳐진다. 공간 구성도 여느 메이저 갤러리 못지않은 크기와 조닝(zoning·공간 구분)을 갖추고 있다. 국내 신진 작가들의 컨템퍼러리한 전시와 현대미술의 전방에 있다고 일컬어지는 베를린의 젊은 아티스트들의 새로운 작업을 볼 수 있어서인지 공간을 방문한 이들의 모습 역시나 매우 힙하고 개성 넘쳤다. 아, 이들이야말로 구찌만의 느낌을 완성해주는 마지막 방점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무릎을 ‘탁’ 쳤다.

파운드리서울에서 열렸던 디자인 듀오 강혁의 전시. 임지선 제공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의 지하에 있는 갤러리로 에르메스 재단에서 지원하고 운영하는 곳이다. 늘 수준 높은 현대미술 전시와 소장품 컬렉션을 볼 수 있어 많은 미술인이 즐겨 찾곤 한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는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내 아티스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작품세계를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시 공간으로 “삶의 한 형식으로서의 예술”을 제안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시작한 신예 조각가 현남의 개인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를 관람하고 나오며 아뜰리에 에르메스와 접하고 있는 카페 마당을 통해 계단을 올라가며 메종 에르메스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도시 풍경의 현재와 미래를 구성했다는 현남 작가의 작업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을 이어오다가 다시 바라본 에르메스 안의 풍경이 새로웠다. 늘 알고 있던 제품, 크게 바뀌지 않는 오랜 역사의 디자인과 제품인데도 환기된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해석이 달라지더라. 어쩌면 브랜드 입장에서는 브랜드 옆 예술이란 게 시선의 환기와 관심의 다층화를 꾀하는, 고차원적 전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남의 개인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 임지선 제공

영미 문화권에서 미술을 표기할 때 순수미술은 파인 아트(Fine Art)로, 디자인이나 공예 등 응용미술은 어플라이드 아트(Applied Art)로 표기한다. 이는 실제적인 효용에 목적을 둔 패션 디자인 등 장식과 공예의 영역이 예술의 연장선이라고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위의 브랜드에서 다루는 옷과 가방, 장신구 역시 예술에 뿌리를 둔 응용미술이다. 들여다볼수록 브랜드와 예술은 관련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가까이하다 보면 생각보다 이 문화가 매력적이고 유용함을 알 수 있다. 예술, 그것 참 돈 안 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풍요롭고 획기적이며 끝을 두지 않은 무한한 창조의 세계가 빚어내는 유산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매끄럽고 윤택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실제로 보다 나은 디자인의 가방, 한 점의 옷, 작은 팔찌 하나까지도 예술로부터의 영감에서 시작되어 실용적인 형태로 탄생하곤 하니까.

아름다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예술의 철학과 가치가 켜켜이 올라가 순간마다 빛을 내고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브랜드들은 이를 더 깨달아 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브랜드는 단순히 소비자의 니즈만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그들의 멋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브랜드여야 한다는 것을. 예술은 늘 그러한 역할을 해오던 가장 좋은 친구라는 것을.

임지선(브랜드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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