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오픈 릴의 세계, 손 많이 가지만 멈출 수 없어

등록 2023-03-18 12:00
수정 2023-03-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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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짠내 수집일지 릴 투 릴 테이프 리코더

원음의 손실 적고 녹음·편집 자유
운용 번거롭지만 궁극의 아날로그
‘난 행복해’ 첫 재생땐 날아오를 뻔

제주도에서 ‘당근질’로 마련한 아카이 1800D-SS(뒤쪽), 3년 동안 자가 보수해 정상 작동한다. 동네 전파사에서 사들인 전문가용 릴 리코더 타스캄 34B(앞), 플레이가 안 돼 새 근심거리가 됐다. 오랜 세월 탓에 제 기능을 못하는 핀치롤러(사진 오른쪽 맨 앞), 결국 새 것으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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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크고 운용이 약간 번거롭지만 오픈 릴 사운드는 가장 아날로그다운 소리를 내준다. 자극이 없으면서도 음악적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데 오픈 릴 테이프보다 더 나은 소스는 없다. 아날로그다운 소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오픈 릴 테이프를 시작하면 된다.”

아날로그 오디오 입문자에게 일종의 바이블 같은 <최윤욱의 아날로그 오디오 가이드>는 턴테이블, 포노앰프(턴테이블의 소리를 읽어 음원을 키우는 장치), 엘피(LP)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다룬 책으로, 끝부분에 ‘오픈 릴 오디오’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전한 뒤 이렇게 적었다.

레트로 바람이 불면서 엘피는 물론 카세트테이프까지, ‘아날로그의 역습’이 확산한다. 하지만 궁극의 아날로그라는 오픈 릴의 세계는 낯설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음향기사 상우(유지태)가 라디오 피디 은수(이영애)와 함께 대숲, 산사에서 바람 소리, 풍경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장비가 바로 오픈 릴이다. 정식 명칭은 ‘릴 투 릴 테이프 리코더’(Reel to Reel Tape Recorder·릴 리코더) 다. 보통 7인치, 10인치 원반 릴에 감긴 마그네틱테이프가 릴 리코더의 헤드를 지날 때 강한 자장을 걸어 소리를 기록·재생하는 장치다. 1940년대 초반 개발됐는데 원음 손실이 적고 녹음·재생뿐 아니라 믹싱과 편집까지 가능해 가수와 연주자가 원음을 녹음한 마스터 테이프를 만들고, 그걸 기초로 엘피·시디 등을 제작해 왔다. 1960~70년대 리복스, 스튜더, 아카이, 티악, 데논 등 브랜드에서 릴 리코더를 대중화했고, 21세기에도 전문가와 일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선 인기가 여전하다.

제주에서 ‘당근질’, 아카이 릴 득템

짠내 수집 이력이 10년을 넘자 차원이 다른 소리를 낸다는 릴 리코더를 돌려보고 싶다는 욕망은 커졌다. 하지만 서울 용산, 황학동, 세운상가 오디오 샵에서도 릴 리코더는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 가물에 콩 나듯 한두 대 눈에 띌 뿐인데, 온전한 건 100만원을 훌쩍 넘겼다. 릴 테이프도 개당 5만~6만원이다.

짠내 수집엔 인내가 필요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허름한 동네 전파사와 당근마켓을 5년 동안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러다 2020년 5월 기회가 왔다. 당시 관훈클럽 감사였던 나는 제주도 세미나에 참석했다. 일정을 끝내고 호텔 방에서 당근마켓을 뒤지는 데 15만원에 ‘아카이 1800D-SS’가 올라왔다. 1972~76년 출시된 제품이다. 판매자에게 “실물을 보고 작동 여부를 알고 싶다”고 했다. 1박2일 일정 탓에 대면 거래는 불발했다. 판매자는 “고가에 샀고, 지금은 작동 되다 안 되다 한다”며 “결정하시라”고 했다. 대신 “감귤농장 택배로 서울까지 물건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반신반의했지만 다시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수많은 버튼, 4개의 출력창, 7인치 릴이 걸린 외관에 끌렸다. ‘작동이 안 되면 인테리어용으로 쓰지 뭐.’ 합리화하며 15만원을 입금했다.

감감무소식, 사기당한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아오를 즈음 물건이 도착했다. 무게 23㎏, 택배 기사도 혀를 내둘렀다. 일단 겉모습에 반했다. 아날로그의 현신, 그 자체인 듯싶었다. 환희는 잠시, 그 후로 오랫동안 수고스런 나날이 이어졌다. 릴 테이프는 돌지 않았다. 구글에서 사용자 매뉴얼, 서비스 매뉴얼을 찾아 열공했지만 허사였다. 어쩌다 우연히 돌아도 채 2분도 안 돼 멈춘다. 아내의 잔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하다 하다 이제 제주도까지 가서 고물을 수집하냐?” 그렇게 두달여 매달리다 포기했다. 장식품으로 거의 3년을 방치했다.

그러나 짠내수집일지에 꼭 릴 리코더 성공기를 쓰고 싶었다. 전자제품 회로도와 작동 원리를 설명한 서적을 읽고, 해외 유튜버와 수리 기사의 동영상을 보며 분해하고, 기름칠하고, 닦고, 조였다. 그리고 올해 2월 드디어 내 멋대로 운용법을 찾았다. 50년 세월이 지난 기기를 살려내 이소라의 ‘난 행복해’를 녹음·재생했을 땐 날아오를 듯했다.

물론 온전한 작동은 아니다. 릴 테이프의 속도를 조절하는 금속 기둥인 캡스턴과 고무바퀴 일종인 핀치롤러가 릴 테이프를 정확히 물고 돌아야 하는데 반백 년을 맞은 낡은 기기라 회전 중에 캡스턴은 빠지고, 가끔 릴 테이프가 물려들어가 씹혔다. 멀쩡한 캡스턴과 핀치롤러를 구하는 게 지상 과제였다. 해외 직구가 가능했다. 하지만 핀치롤러, 그 작은 고무바퀴 하나에 배송비 포함 13만~15만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런 일은 짠내 수집의 금기다.

욕심이 부른 새 근심, 타스캄 릴

2주 전 동네 재래시장 전파사를 찾았다. 낡은 부속들 가운데 핀치롤러가 있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또 다른 릴 리코더가 눈에 들어왔다. ‘타스캄(TASCAM) 34B.’ 릴 리코더의 명가인 티악이 전문가용으로 1995년 만든 제품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 줄 알면서 욕심이 솟구쳤다. 이건 아예 핀치롤러가 녹아내린 상태였지만, 단돈 10만원이라는데…. 어차피 핀치롤러만 구하면 된다는 심경으로 질렀다. “있는 것도 제대로 작동 못 하면서 또 사들여!” 아내는 불같이 화를 냈다. 같은 물건을 1800달러에 판다는 해외 유튜버 영상을 보여줬다. “전기 잘 들어오고, 앞뒤 회전 원활하고. 핀치롤러만 바꾸면 100만원 이상 버는 것”이라 강변했다.

핀치롤러를 구하러 을지로 대림상가, 종로 세운상가의 빈티지 오디오 가게를 뒤졌다. “그런 부품, 국내에서 구할 수 없다”, “옛날엔 길 건너 공업사에서 깎아줬는데 요즘은 그런 기술자도 없다”고 했다. 또 긴 세월 묵혀야 한다고 생각할 즈음 ‘귀인’을 만났다. 아카이 1800D-SS의 부품은 없었지만 “같은 사양의 티악 핀치롤러가 있다”며 “바꿔 끼우면 된다”고 했다. 5만원에 샀다. 녹아내린 타스캄 34B 핀치롤러도 “충남 광천군에 깎아주는 이가 있다”고 했다. 6만원에 주문했다.

그날 밤 핀치롤러를 바꿔 끼운 아카이 1800D-SS는 온전히 작동했다. 김연지의 ‘위스키 온더락’,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녹음하고 재생했다. 모든 게 정상 작동한다. 3년 가까운 기다림에 대한 보상. 아니 짠내수집일지에 성공담을 쓸 수 있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그런데 새로 사들인 타스캄 34B가 새 근심으로 떠올랐다. 이틀 걸린다는 핀치롤러는 8일 만에 받았다. 부푼 마음에 짜잔~,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먹통이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같은 방향으로 돌아야 할 왼쪽, 오른쪽 릴 테이블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며 줄다리기하듯 팽팽하게 테이프를 당기며 멈춘다. 캡스턴은 돌지도 않는다. 돌아버릴 것 같다. 궁극의 아날로그 맛? 정말 손이 너무 많이 가는 일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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