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원이 정몽구(69) 현대차그룹 회장에 이어 김승연(55) 한화그룹 회장의 항소심에서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를 두고 법원의 ‘재벌 봐주기’ 관행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 회장의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김득환)는 11일 김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이유로 △아들이 집단폭행 당한 것을 보고 아버지의 정이 앞서 사리분별력을 잃은 점 △동원한 폭력배들이 직접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점 △범행이 치밀하게 계획된 것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점 △피해자들의 상해 정도가 심하지 않고 이들과 합의한 점 등을 들었다.
재판부는 특히 ‘아버지의 정’을 강조했다. 남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 김 회장의 범행 동기는 사회통념상 허용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일반 폭력사건과의 형평성을 거론하며 김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김득환 부장판사는 재판이 끝난 뒤 “재력이나 회사 조직이 있어야 가능한 사건이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재벌 회장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 스스로 김 회장의 범행에 대해 “사적 보복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등 형사처벌 대상”이라며 1심의 실형 선고 이유를 거듭 인정한 점에 비춰보면 법원의 ‘재벌 봐주기’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은 무려 6개의 혐의로 기소됐고, 1심 재판 때는 법정을 모독하는 듯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대법원 판사는 “우발적 폭력이 아닌 사적으로 위력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죄질이 매우 나쁘다”라며 “교통사고 등의 일반적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재판부가 피해자와의 합의를 받아들여야 할 의미가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 직후 강조한 ‘화이트칼라 범죄 엄단’ 기조가 2년 만에 흐지부지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이 대법원장의 발언 이후 법원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2심에서 실형을 선고하고, 삼성 에버랜드 사건 1, 2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하는 등 기업범죄를 엄단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여연대는 이날 성명을 내어 “재벌 총수가 아닌 일반인이었다면 집행유예나 사회봉사 명령이 선고됐을지 의문”이라며 법원 선고를 비판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