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에 저항하다 숨진 김오랑 당시 소령의 형 김태랑(77)씨가 지난 6일 부산 사상구 엄궁동 자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인터뷰하며 울먹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김오랑 :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12·12직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던2기 선배 박종규 중령 총에 맞아허삼수·장세동 등 쿠데타 세력선거 나오는 것 보며 화가 나‘추모비 결의안’에 그나마 안도“우리 동생 다시 태어나는 느낌”
가해자는 잘 살고 있다. 1672억원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잘 산다. 전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숨진 이름 없는 사병과 하급장교의 유가족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1979년 12월12일 밤~13일 새벽 김오랑 당시 소령은 반란군에 맞서다 숨졌다. 역사적 평가는 34년 만에야 비로소 바로잡혔다.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 수정안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의 반대로 ‘무공훈장’은 ‘훈장’으로 바뀌었다. 결의안이 실천될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법적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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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병의 죽음은 더욱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었던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를 점거하려는 신군부에 저항하다 숨졌고, 신군부 쪽 33헌병대 소속이던 박윤관 일병은 참모총장공관 초소를 점령한 뒤 해병대가 초소를 되찾는 과정에서 숨졌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도 풍요로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족과 달리, 두 사병과 김오랑 소령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한겨레>는 시민의 힘으로 전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찾아 추징하는 ‘크라우드 소싱 기획’의 일환으로, 군사반란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개한다.
12·12직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던2기 선배 박종규 중령 총에 맞아허삼수·장세동 등 쿠데타 세력선거 나오는 것 보며 화가 나‘추모비 결의안’에 그나마 안도“우리 동생 다시 태어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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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상처를 ‘죽을 때까지 안고 산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8살 아래 동생 김오랑 소령을 잃은 형 김태랑(77)씨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졌다. 유신헌법을 만든 독재자가 숨지자 국민 대부분은 민주화가 오리라 전망했다. 박 전 대통령이 총애하고 특혜를 줘온 군부 사조직 ‘하나회’가 권력투쟁에 나섰다. 유신체제에서 누린 기득권을 잃으리라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등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그해 12월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무력으로 연행했다.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은 ‘군인 정치’는 안 된다며 군사반란에 맞섰다. 김오랑 소령은 당시 정병주 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김 소령은 신군부에 맞선 사령관을 지키다 반란군의 총격으로 35살에 숨졌다.
김씨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사과한 신군부 인사가 아직 한명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34년 맺힌 한은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에 의한 생채기를 안고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아온 그가 8년 만에 언론 앞에 섰다. 기자가 “당시 김오랑 소령 사망소식을 어떻게 전해 들었냐”고 묻자 그는 그날 저녁 상황을 생생히 떠올렸다.